앙상블에 대해

©김지곤
프리 (재즈) 하는 사람들에게 앙상블이란 공부가 깊어질 때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거쳐야 할 필수 작업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앙상블 제의를 거절하지 않는다. 솔로 만을 해오다, 내게 공부 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앙상블이란 클래식으로 말하자면 현악 4중주나 피아노 3중주 같은 실내악이다. 클래식이건 재즈건 그 형식이 정제미의 대명사인 사실에는 다름이 없다)
나, 김대환(타악), 최선배(트럼펫), 김동성(피아노), 함기호(베이스) 등이 5~6인조 형태로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 호텔, 도쿄 호텔, 로얄 호텔, 코리아나 호텔, 백림 호텔 등지의 나이트 클럽에서 팝과 스탠더드를 번갈아 연주해 주었는데, 내적으로 점점 커져 만 가던 음악적 갈등을 해소할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밤 업소를 그만 두게 된 까닭이다.
상업 음악과의 인연은 그렇게 35세로 끊겼다. 긴 휴식의 시간이 뒤를 잇는다. 그러나 1978년 공간사랑의 기획자 강준혁이 나를 수소문 끝에 찾아 나를 무대로 끌어냈다. 어떻게 좀 쉬어볼 팔자도 못 됐던가 보다. 나의 재즈로 봐서는 즉흥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과감하고 실험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동시에 길옥윤 악단 등 대여섯 단체와 함께 대중적 재즈도 다시 시작했다. 실험과 대중적인 재즈가 공존한, 상당히 특이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 시기가 독특했던 게, 관객에 대한 부담을 본격적으로 느끼게 됐다는 점 때문이다. 거의 학구적 관심으로 내 연주에 집중한 사람들 앞에서 새 작품을, 그것도 매달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을 리 없었다. 사실,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태반이 탈퇴했던 게 그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과격한 실험 무대를 펼치고 나아가 관객 앞에 평가 받아야 했으므로 번듯한 생활인과는 거리 멀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 1년 지나니 나, 김대환, 최선배만 남게 됐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셋은 가족이나 생활에 대한 의무감 없이 음악을 통한 승부의 세계에 결사적으로, 비상식적으로, 몰염치하게 투신했던 것이다.
1978년 김수근의 공간사랑에서 연출가 강준혁씨를 극장장으로 해 1달 1회 재즈 공연을 할 때였다. 내 팀 말고도 길옥윤, 엄토미, 최세진 악단 등 대여섯 그룹이 더 출연해 재즈가 당당한 극장 공연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던 때였다. 우리 재즈는 연주, 즉흥, 인형극 등 예술 프로그램의 범주에 들었다. 무속 음악이라고만 돼 있던 사물놀이가 처음으로 결성된 바로 그 때 그 곳이다. 우리 밴드는 보통 5~6명 구성했는데 스님의 염불을 무대에 올렸으니 상당히 실험적 성격도 강했다.
재즈로 당당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공연 포스터도 찍었던 그 때를 나는 (재즈맨으로서의) 첫 공식 활동으로 본다. 사실 그보다 10여 년 전, 미8군 음악을 드라마센터 무대에서 하다 부정기적이긴 하지만 재즈를 올리기도 했다.
상당히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 생각 많이 한다. 미술가, 음악가들이 커피숍에서 자유로이 토론을 벌이던 그 곳은 내게 곧 예술 학교였다. 귀동냥 만으로 한 것이었지만, 내 일생에서 가장 예술 공부 많이 한 때다. 문학인, 미술가, 건축가, 작곡가들의 아지트였다.
김수근과 함께 한 당시 8년은 일생일대의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그 공간은 국경을 뛰어넘어, 담배를 피워도 되는 극장인 도쿄의 ‘아레홀’ 같은 아이디어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처럼 전위와 대중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당시 결성한 강트리오의 경우, 작곡자였던 나는 프리 스타일로 주제를 악보에 기록했는데, 당시는 전위적이라 했으나 지금 쓰면 대중적이다. 예를 들어 1집 수록곡 중 ‘바가지’가 그렇다. 마누라가 남편한테 긁어 대는 바가지를 소재로 25세 때 작곡한 것인데 당시는 프리 스타일이라 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비밥 쪽에 가깝다.
비슷한 평가로 귀결되는, 일본에서 냈던 나의 앙상블 판 ‘I Think So’ 경우도 그렇다. 말 할 때 “내 생각인데”라며 전제하는 버릇에서 따온 제목인데 생각의 상대성, 유동성을 말하고 싶었다.
내 앙상블은 프리 앙상블이다. 먼저 함께 하는 연주자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어떤 어법을 어디까지 쓰고 어떤 스타일로 하는지, 재즈의 어디까지 연구됐나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대 실력의 파악을 대전제로 하는 것은 내 음악의 목적이 상대와의 대화에 있기 때문이다. 제시하고 응답하는 대목은 두 번째다. 중요한 것은 때로 반격도 해야 하고 거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토 마사히코는 이 문제를 두고 이론으로 정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