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 길레스피의 트럼펫, 하늘을 향하다: 우연이 빚은 혁신
1939년, 파커는 뉴욕으로 입성, 향후 1년 동안 먼로스 업타운 하우스 Monroe’s Uptown House
라는 클럽에서 일했다. 보다 장기적인 계약을 맺고 본격 뉴욕 생활에 들어간 1941년 전, 파커는 캔자스의 맥샨 밴드에 다시 입단했다. 그가 디지 길레스피를 만나, 음악적 지향점이 서로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데가 바로 거기이다. 그 이전에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신통하게도 두 사람 모두가 독자적으로 재즈의 새로운 화성 영역을 탐색해 오다, 이제야 서로를 알게 되어 각자의 경험을 나누게 되었다.
1944년, 노블 시슬, 얼 하인스, 앤디 커크와 활동하고 난 파커는 빌리 엑스타인에 합류했다. 그것은 비밥, 즉 자신의 운명과 조우한 첫 계기였다. 당시 길레스피는 그 악단에 적을 두고 있었다. 멀잖아 파커와 디지 두 사람은 그 밴드의 나아갈 바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드디어 소편성 그룹을 결성, 함께 호흡하는 긴밀한 사이로 발전한다. 두 사람은 특히 열악했던 드럼 연주에도 불구, 재즈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 멋들어진 한 판 Groovin’ High
과 쇼 너프 Shaw’ Nuff
를 탄생시켰다. 그 곡들은 비밥이라는 신생 재즈의 교과서적 모범이기도 하다.
옛 코드 진행 방식은 파커의 혁명적 화성 체계로 교체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화성 구조와 즉흥 연주 방식에서 탈피한 파커의 솔로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몹시 변칙적이고 공격적인 소리로 들렸다. 그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실로 가공할 만한 무차별적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선택
이란 파커의 음악에 욕을 마구 퍼붓고, 자기네들의 미래를 공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수군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 때문에 파커는 깊이 상처받았다. 그는 자기의 옛 악습에 훨씬 깊숙이, 거의 자기 파괴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6년, 약물로 찌든 그의 심신은 깡그리 박살 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장기간의 투병 생활을 치른 그는 일류급 재즈 뮤지션들의 세션 그룹 JATP와 한차례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참으로 의미 깊었던 것은 다이얼(Dial), 사보이(Savoy) 음반사에서 만든 소편성 캄보 음반들이었다. 그 일련의 음반들은 비밥이란 새 음악에 대해 무분별하게 가했던 폄하적 판정을 번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결정타였다는 점에서 이전에 길레스피와 함께 활동했던 그룹보다 더 공로가 컸다.
그 5중주단의 또 하나의 자랑은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젊은 트럼페터였다. 베이시스트 토미 포터의 역량이 처지긴 했지만, 그 5중주단은 이후 모든 비밥 퀸텟의 모델이 되었다. 천부적 리듬 감각의 맥스 로치가 드럼을 맡고 있었고 듀크 조던과 버드 파웰이라는 당대 최고의 멜로디 파트가 포진해 있었다. 무엇보다 리더인 파커야말로 발군의 실력자였다.
이들이 남긴 음반들은 뒷날, 비밥이라는 특정 장르는 물론 음악 일반이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도 위대한 재즈 음반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이것은 활달한 도입부(attack), 다른 재즈 뮤지션들의 옹색한 화성 영역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폭 넓은 화성 감각 때문인데, 이 모든 특성들이 바로 파커로부터 비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