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파커, 재즈사에 길이 빛날 이름: 객관적 평가와 유산
파커에게 아니 보다 정확히는 일급 재즈 뮤지션들 모두에게 전통이란 거추장스러운 허물이나 속박이 아니라 이렇듯 훌륭한 디딤대인 것이다.
재즈의 영원한 표상, 찰리 파커
여기 재즈 뮤지션들 중 연주력이 뛰어난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치자. 찰리 파커는 그들 그룹의 중앙부에 있다. 나아가 그 삶의 강렬함, 그에 걸맞은 천재성을 고려한다면 그는 그 핵심부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재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찰리 파커는 연주 실력이 예외적으로 뛰어난 일개 뮤지션만은 아니다. 그는 재즈라는 예술을 통하여 인간이 오를 수 있는 하나의 정점이다. 상징 symbol
혹은 기호 sign
이다.
그의 음악은 힘차고 독창적이며 아름답다. 물론 오늘날의 재즈 뮤지션들 중에는 파커를 기법적으로, 또 기교적으로 능가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의 아웃사이더적 모더니스트적 삶의 풍경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욱 빛나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
들이었다. 보통 사람이 예술하는 사람에게 흔히 품기 일쑤인 예외적 삶
의 풍경들이 그의 삶에서는 일상
이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예술가에 대해 거는 일종의 기대라면, 그는 그런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 전형적인 비밥 캄보에서의 찰리 파커.

▲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는 비밥의 쌍둥이로서 재즈의 가장 빛나는 모멘트를, 또한 재즈의 가장 예리한 시추에이션을 간직하고 있다.
- 둘의 1950년대의 작품을 수록한 앨범
『버드와 디즈』
삶 자체가 곧예술
이었던, 또 세상으로부터는 몰이해와 냉대만을 돌려받은 한 천재의 모습을, 우리는 파커에게서 보게 된다. 파커의 인생은파격으로서의 삶, 그리고 존재 이유로서의 예술
과 동의어이다.
찰리 파커는 뛰어난 재즈 뮤지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지금은 지극히 관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식의 표현은 너무나 관습적이고 피상적이다. 좀 더 사실에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파커는 그 풍부한 창조력과 독창적 아름다움으로 그때까지의 재즈를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말해야 한다.
파커가 세상을 뜨고 나니, 그 인기와 존경의 도는 수직 상승했다. 이것은참 재즈
— 또는 진짜 예술——라면 겪게 되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파커 이전의 재즈 뮤지션으로서 그에 맞먹는 충격을 던진 경우를 굳이 들라면, 딱 한 번 찾을 수 있다. 파커보다 25년 전에 최고의 음악적 정점에 달했던 루이 암스트롱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 둘의음악적 논리
를 관류하는 공통점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기 시대에 유행하던 재즈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논리의 음 조직 melodic phrase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파커는 1920년에 태어나 1955년에 세상을 떴고, 암스트롱은 1900년에서 1971년까지 살았다. 그러나 그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파커는 재즈적, 또한 모더니스트적 삶의 전형으로서 참으로 풍성한 텍스트를 제공한다. 파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레니 트리스타노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최근 10년 동안 만들어진 거의 모든 음반들에 실린 곡들을 그가 만일 들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가 벌떡 살아나 저작권 소송이라도 제기한다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이같이 통찰한 레니 트리스타노(1919-1978)는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생시에는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적 대부이기도 했던, 대단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또, 파커가 자기 시대의 뮤지션들에게 끼쳤던 충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앨 콘은 아주 인상적으로 전하고 있다.
찰리 파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파커야말로 진짜 거인 giant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좀 한다 하는 사람들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내 말이 허풍 같으면, 이렇게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그가 남긴 솔로 애드리브라면, 아무거나 좋다. 할 수 있다면, 그걸 악보에 옮겨 분석해 보라. 진정한 창조력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어떻게 응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이 바로 거기 있으니까.
그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연주한 사람이 그 말고는 아무도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그래서 엄청난 음악적 충격을 몰고 왔다. 게다가 그가 보여준 생활 풍경은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참으로 가공할 만한 terrible 것이었다
파커가 버드 bird
라는 별명을 갖게 된 내력은 앞서 밝혔다. 우스꽝스럽게도, 그 단어가 원래 지칭한 것은 새
가 아니라 닭
이었다. 그 일화를 통하여, 그와 그 주위의 풍경을 조금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가 남긴 그 흥미진진한, 또한 쓰라린 삶의 편린들 속으로 좀더 들어가 보자. 이 일은 재즈라는 예술을 진지하게
, 즉 삶의 방식으로서
이해하기 바란다면 거치고 지나가야 한다.
파커는 훗날 진정 위대한 뮤지션으로 받들어졌으나, 초창기에는 기초도 없는 애송이
라는 빈정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나중에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했다. 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색소폰으로 조옮김하는 법을 배울 때였다. 예를 들어, G-키(사 장조)의 곡을 실제 연주회에서는 F-키(바 장조)로 바꾸어 연주하는 식 말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이 곡에서는 이 키로 연주해야 한다
는 식의 고정 관념에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다.그 문제에 대해 나대로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나는 색소폰을 들고 클럽으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악사들이 여러 명 있었다. 먼저 그들이
연인 Body and Soul
을 연주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 연습해 온 대로인동덩굴장미 Honeysuckle Rose
로 그 선율을 받았다.그러자 그들은 배꼽을 쥐고 웃더니만, 나를 밖으로 내쫓았다. 그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내가 그 클럽에서 나가고 한참 뒤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일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음악적 설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일반에게 잘 알려진 발라드인 연인
은 당시 일반적으로는 G-키로 연주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악사들이 파커라는 신출내기를 향해 그 곡을 연주한 것은 곧 생판 처음 보는 그에게 문제 하나를 던진 셈이다. 어디 한번 받아보라
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기(氣) 싸움
이기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 예인 세계 내에서의 독특한 수인사법(修人事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문제
를 받은 파커는 관례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즉, 그는 키를 바꾼 것은 물론, 곡목까지 바꾸어 받은 것이다. 그러자 그 악사들이 어리둥절해진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그 연주를 듣고 파커에게 보낸 반응, 즉 냉소와 박대
는 파커가 이후 평생 동안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조그마한 서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날 파커와 함께 연주하던 일급 드러머 조 존스(Jo Jones)가 공연 끝 부분에서 자기 드럼 세트에 걸려 있던 심벌즈를 벗겨 내고는 파커의 발 앞으로 와장창 냅다 내팽개쳐 창피를 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사람들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다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다음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악사 에디 베어필드(Eddie Barefield)가 훗날 들려준 또 다른 짤막한 회고이다. 그 역시 배꼽이 찢어져라 웃었던 것은 물론이다.
파커가 연주하는 것을 실제로 본 것은 그때 캔자스시티에서가 처음이었다. 당시 약관이었던 그의 연주는 너무 엉망이어서 우리 모두는 팀에 넣기를 꺼렸다.
창피를 당한 파커는 오클라호마로 가서는 버스터 스미스(Buster Smith)와 여섯 달 동안 붙어 다녔다. 스미스는 열과 성을 다해 파커를 가르쳤다. 그 후 여섯 달 뒤에 나타난 파커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파커가 맨 처음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캔자스시티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그 도시는 연예 도시로서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찰리는 그래서 시카고 쪽의 사정이 알고 싶었다. 그런데 빈털터리였던 그는 궁여지책으로 화물 열차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시카고에서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가 말한다.
시카고에 닿자 열차에서 내리고는, 다짜고짜 얼 하인스의 연주를 들으러 간 그는 완전한 촌닭이었다. 제일 먼저 분장실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색소폰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색소폰 한 대가 마침 밖에 놓여 있었다. 파커는 그것을 보고는 다짜고짜 색소폰에 달려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임승차에다 끼니마저 거른 꾀죄죄한 행색 그대로.
그 색소폰의 주인은 얼 하인스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자로서, 별명이
건달 Goon
인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웬 젊은이가 자기 악기를 만지고 있더라는 말을 들은 그는 먼저 외마디 소리부터 버럭 질렀다.
아니, 뭐야?
그러고는 낡아빠진 색소폰 한 대를 거지에게 적선하듯 파커에게 아무렇게나 던져주고는 무대 밖으로 내쫓아 보내고 말았다.
그 비슷한 이야기도 제법 있다. 그런데 군 가드너 Goon Gardner가 당시 적을 두고 있던 데가 하인스의 악단이 아니라, 킹 콜랙스 King Kolax 악단이었다고 하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당시 시카고의 럼-부기 클럽 Rum-Boogie Club에서 파커의 연주를 처음으로 듣게 된 사디크 하킴 Sadik Hakim — 이 이슬람식 이름은 훗날 개명한 것이다. 당시의 미국식 이름은 아곤 손턴 Argonne Thornton이었다 — 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초창기의 버드에게는 리허설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촉박했던 그는 쇼 시작 시간보다 2, 3분 일찍 와서
분위기
를 살펴보는 것이 일과였다. 제3알토 색소폰 자리라도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리더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어느 날, 그러던 파커에게 드디어 요행으로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무대에 서게 된 그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평소에 연습해 둔 대로 즉흥 변주를 해나갔는데, 청중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참신할 수 없었다.
지미 도시 Jimmy Dorsey가 셔먼 호텔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버드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당장 그 연주를 들으러 왔다. 버드의 밴드 리더는 그 소식을 듣자, 또 무슨 일이 터지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도시는
체로키 Cherokee
를 청했다. 파커가 리더로서 곡을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버드의 연주는 신들린 듯했다. 도시는 그 연주를 듣고 나서는 파커가 쉬고 있던 분장실로 가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말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야
그는 자신의 색소폰
패들리스 셀마 Padless Selmer
를 선뜻 파커에게 준 것이다. 아직 몇 번 불지 않은, 새거나 진배없는 색소폰이었다. 그런데 돈이 몹시나 궁했던 파커는 바로 그다음날 반짝이던 그 색소폰을 전당포에 잡힐 도리밖에 없었다.뒤늦게 그 일을 알게 된 나는 전당포 문 앞까지 헐레벌떡 따라가, 제발 참으라며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정작 자기 색소폰은 종이와 테이프를 덕지덕지 처발라 둔 고철 덩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기가 낡았다거나 새것이라는 따위의 문제는 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가 보다.
그 다음, 파커는 제이 맥샨 밴드에 입단하여 그와 함께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맥샨의 말을 들어보자.
버드가 솔로를 연주할 때가 왔다. 그런데 당시 우리끼리는 다들 알고 있었던 일인데, 파커는 발에 상처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다. 파커의 솔로 차례가 와서 앞으로 나가 연주할 때면, 신발을 벗어버린 양말 차림의 발이 관객들 앞에 훤히 그대로 다 노출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그 모양을 보고는 다들 숨이 끊어져라 웃어댔다. 유독 커다란 파커의 엄지발가락이 빠끔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커와 한 방을 썼던 지미 포리스트 Jimmy Forrest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때가 1940년쯤이었으니까, 15달러짜리 스포츠 셔츠라면 꽤 좋은 편에 속했다. 나는 돈을 좀 모아서, 셔츠 세 장을 샀다. 한 벌에 각각 15달러짜리였다.
그것은 하룻밤 일하고 7달러 받던 당시, 나로서는 적잖은 지출이었다. 하여튼 나는 새 옷을 사들고 호텔 방으로 와서는 그걸 펼쳐 보이며 파커에게 말했다
야, 버드. 내가 뭘 갖고 있는지 어디 한번 봐
파커는 이 말을 듣더니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음, 그래. 그중 내 거는 어느 거지?
(웃음)
파커는 인간적 매력을 대단히 풍기는 사내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한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맥샨이 파커에게 옷차림에 신경 좀 쓰라고 애원하듯 타이르기도 했다. 자기 밴드에서 파커의 행색이 제일 후줄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파커는 그주문
을 듣고 이렇게 답했다.
이봐요, 내가 건실하게 차려입고 교수 같은 태도로 근엄하게 연주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맥샨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파커의 연주 그 자체가 관심사였다. 파커를 자기 악단에 들여놓고 뉴욕에 연주 갔을 때, 파커가 그곳 뉴욕의 악사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던가를 맥샨이 이야기했다.
당시, 일류 색소폰 주자 벤 웹스터 Ben Webster가 뉴욕 중심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료 모두에게큰마음
먹고 한 말이 있다.
자기가 색소폰을 제법 분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누구든 가볼 데가 있어. 제이 맥샨 밴드에 있는 색소폰 주자인데,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야. 자네들, 적어도 한 번은 그 친구 연주를 들어보게. 학교에 가서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테니까
그는 내심 파커의 뛰어난 역량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는 파커라는 존재에 대해 용감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정작 우스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웹스터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악사들은 처음에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더니만, 각각 그곳에 몰래 가서 확인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행여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 눈치 살피기에만 바빴다는 것이다!
암스트롱과 명콤비를 이루었던 피아니스트 얼 하인스가 맥샨 밴드에서 탐냈던 사람은 우선 찰리 파커와 나머지 두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을 내 팀으로 데려가도 되겠지?
드디어 하인스가 내심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협상
이 이루어졌다.
어디 앉아서 그 일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그 사람들이 자네한테 얻어다 쓴 돈이 얼만가? 자네가 그 사람들을 놓아준다면, 대가는 중분히 지불하지
듣고 있던 맥샨은 그 제의에 동의했다. 즉석에서거래
가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인스는 한마디 했다.
그 동안 쭉 지켜봤네만, 나는 자네가 저 찰리 파커라는 사내를 잘 다루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하네. 그 사람은 완전 어린애야. 이제 내가 데려가서 사내로 만들어 오지
하인스는 자기 큰소리대로,파커 어른 만들기
에 과연 성공했던가? 맥샨의 말을 들어 보자.
그 뒤 하인스를 만나니, 이런 말을 하더구먼.
이 미친 작자를 어서 좀 데려가 주게나. 자, 이것 좀 보게. 그자가 돈을 빌리지 않은 단원이란 한 명도 없어. 동네 사람들 돈도 한 번씩 다 빌려 쓰지 않았는지 모르지. 또 갚는 데에는 왜 그리 굼벵이인지!
파커가 일생 동안 두고두고 골치를 썩인 그 돈 문제의 출발점은 열일곱 살 이래 헤로인에 빠져들게 되고부터였다. 다른 마약 중독자들보다 활동적이기는 했으나, 시간 개념이 엉망으로 무너져 갔다는 점이 사회 생활에 가장 큰 말썽이었다. 연주 시간 어기는 일이 점점 일상화되어 갔다.
중독에 점점 깊이 빠져들면서부터 파커는 클럽 주인이나 동료 뮤지션들과의 약속보다는 마약 거래선을 확보해 나가는 일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스타급 솔로이스트로서 각광받게 되면서부터는 적지 않은 돈을 만지게 됐으나, 결국에는 마약에 탕진했을 뿐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무렵, 파커는 주삿바늘 자국이 무수히 나 있는 자신의 한 팔뚝 안쪽을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침통하게 말했다.
이건 내 자가용 캐딜락이지
이어 다른 쪽 팔뚝까지 꺼내 보였다.이건 내 집이고 ……
파커가 얼 하인스 악단에 적을 두고 있을 때, 그 행색은 어떠했나? 빌리 엑스타인 Billy Eckstine의 추억이다.
당시 파커가 출연 약속을 제대로 지켰던 경우란 내가 장담컨대, 거의 없다. 그중 절반가량은 아예 모습조차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는 대개 어디 처박혀 앉은 채로 자고 있기 일쑤였다.
약속을 해놓고도 공연 시간에 닿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가자, 얼은 벌금을 매겼다. 아주 가혹할 정도로. 그 벌금형은 조금의 에누리도 없이 자꾸만 반복되어 갔다. 버드는 툭하면 공연에 빠졌고, 그러면 얼은 또 벌금을 매기고 …….
우리가 디트로이트의 패라다이스 극장 Paradise Theater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버드는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공연 시간을 꼭 지킬 거야. 아예 극장에서 자기로 했지
우리는 그 말을 듣고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그래, 좋았어. 그게 네 생활이야. 우리, 열심히 쇼를 해나가자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다시 일 준비로 모두 바빴다. 그런데 파커는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우리는 생각했다.
쇼 시간에 대겠다고 말은 해놓고 또 어긴 거지……
.어쨌든 쇼는 끝나고 막이 내렸다. 우리 단원들 모두가 각자 자기 짐을 챙기고 떠나려는 그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은 무대 스탠드 밑이었다. 버드가 바로 거기에서 자고 있는 것 아닌가! 공연이 진행되고 있던 내내, 그는 바로 그 밑에서 그 꼴로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눈곱만큼의 거짓말도 없는 사실이다.
파커만이 제대로 잘할 수 있었던 특유의 음악적 장기가 몇 개 있었다. 그중 제일 먼저 손꼽히는 특기는 여러 다양한 음악 장르들로부터 필요한 테마를 뽑아 그것들을 예술적으로 엮어, 하나의 훌륭한 선율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원래의 주제 선율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곁들여 빚어낸 그 변주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똑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의 변주는 매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용하는 선율을 공연 때마다 번번이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트라빈스키 Stravinsky를 열심히 듣다가 다음날은 만토바니 Mantovani, 보 디들리 Bo Diddley, 아니면 기 롬바르드 Guy Lombardo 또는 TV 광고 음악이나 그가 생활하면서 그때그때 듣는 잡다한 음악……, 이런 식이었다.
파커가 평소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당시의 동료 아이드리스 설리번 Idrees Sulieman의 말을 들어 보자.
그때, 우리 집 단골손님은 케니 드루 Kenny Drew였다. 드루는 마치 한 집식구처럼 아무 때고 와서는 레코드를 열심히 들었고, 그러면 아내와 나는 그걸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잠자러 가는 식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 단골로는 드루 말고도 디지와 버드가 또 있었다. 그들은 보통 새벽 한시나 두시에 들이닥쳤다.
내게는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레코드가 많았는데, 나는 버드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내심 껄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파커는 스트라빈스키를 유독 좋아하여, 한번 그걸 틀어놓는 날에는 아예 꿈쩍거릴 생각조차 않고 꾹 눌러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사정 같은 것은 버드의 관심 밖이었다. 내가 눈치를 주면, 파커는 이렇게 말하기 일쑤였다.
나, 여기 있을래
그런데 신기한 것은 파커가 그렇게 그냥 건성으로 얼핏 한번 듣고 치운 것 같던 멜로디가 다음 잼 세션 때는 그의 색소폰에서 꼭 나온다는 일이었다.하루는 마일스와 내가 클라리넷 교본을 펼쳐놓고는 끙끙대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버드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얼마 뒤, 공연 시간이 되어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것 봐라, 아까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던 버드가 그 골치 아픈 선율을 훌륭하게 연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며칠 뒤, 스몰츠 파라다이스 Small’s Paradise라는 클럽에서 잼 세션 할 때의 일이다. 거기 있던 테너 색소폰 주자는 악기를 새로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연주에 들어가려는 자세만 잡아놓고는 그냥 뻣뻣이 서 있기만 했다. 딱 한 소절을 연주하더니, 잠잠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그게 다였기 때문이다. 몸을 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버드는 마치 들리지 않는 연주를 경청하고 있더라도 하는 듯, 앉은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파커에게 말했다.
자, 버드. 나가서 뭔가 보여줘
찰리 파커
그러자 버드는 말했다.
저 사람이 이제 곧 하려는 음악을 나는 다 들었으니, 됐어
바로 다음이 파커의 차례였다. 무대에 올라간 파커는 그자가 하려다 그만둔 선율을 연주했다. 실로 완벽하게!
파커는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얼 하인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앞서가도 한참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찰리 이야기라면, 이 일이 맨 먼저 생각난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무척 까다로운 편곡 작품이 있었다. 몇 번이고 해봤으나 도통 되질 않아, 결국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연주하기로 된 작품이 바로 그 곡이었다. 그동안 다들 끙끙댄 덕택에 그 곡의 분위기 정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찰리는 생판 처음 보는 곡이었다. 그런데 찰리는 연습도 제대로 않았으면서도 자기 테너 색소폰을 끌어안고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내가 참다못해 말했다.
야, 찰리, 어느 세월에 저 곡을 연습할 거야?
그러자 그가 답했다.
내가 다 알고 있는 곡이야
아니, 저 새 곡 말이야
안다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찰리는 그 사이 그 골치 아픈 작품을 통째로 다 익혀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꾸로!
하인스에게 편곡을 전담으로 맡아 해주었던 클리프 스몰츠 Cliff Smalls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찰리의 전공 분야는 알토 색소폰이었지만, 밴드와 함께 연주할 때는 언제나 테너 색소폰을 불었다. 그러나 알토 스타일이 굳어져 버려, 테너 소리가 알토처럼 들렸다.
그런데 찰리는 앉을 때는 언제나 자기 책을 깔고 그 위에 앉는 것이 버릇이었다. 동료 악사들 모두는 악보집을 분주히 꺼내 그걸 보고 연주하고 있을 때, 찰리는 책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다 외우고 있었으니까!
새 곡을 받으면, 길어야 이틀 밤 정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넘기면, 절대 다시 그 악보를 보지 않았다.
뉴욕 아폴로 극장 Apollo Theater 전속 악단에서 파커와 함께 일한 에디 베어필드의 회상이다.
나는 제1테너를, 버드는 제3색소폰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마술쇼를 하는 남자가 대단히 빠른 속도의 음악을 배경 음악으로 깔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빠르기여서, 그쪽의 제1테너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마침 버드가 옆에서 헤매는 꼴을 보고 있다가 그 사람한테 이렇게 말했다.
어디, 그 소절을 나한테 두 번만 연주해 줘요
그 사람은 느릿느릿 한 빠르기로 그렇게 해주었다. 그러자 파커는 그걸 곧 따라 하더니, 그 주(週) 내내 그 곡을 연습해 댔다. 그런데 파커의 연주는 횟수를 더해 감에 따라 점점 더 가속이 붙어 나갔을 뿐 아니라, 매번 할 때마다 변주 또한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그것은 엄청난 고난도의 색소폰 서커스 같았다. 파커는 정말이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
프랭크 소콜로 Frank Socolow 가 페이머스 도어 Famous Door에서 테너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버드가 거기에 왔다.
당시 그는 자주 거기에 들러 내 테너 색소폰을 쥐고는 연주에 끼어들곤 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리였다. 몇 소절 멋지게 연주한 뒤, 원래 자기 파트인 알토로 돌아갔다.
파커가 52번가의 오닉스 클럽 Onyx Club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다음은 사디크 하킴의 기억이다.
버드는 항상 지각생을 면치 못했다. 그곳 주인 마이크 웨스턴 Mike Weston은 버드가 허둥지둥 나타나면 얼굴을 잔뜩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버드가 제자리에 들어가서 몇 소절 연주하면, 금세 얼굴이 환히 펴졌다.
그런데 하루는 늦어도 너무 늦게 나타난 적이 있다. 그때 테너를 맡고 있는 벤 웹스터는 바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고, 나머지 우리 셋은 트리오 연주를 하고 있었다.
버드는 클럽에 들어서서 벤의 테너 색소폰을 집어 들더니,
체로키! Cherokee!
라고 연주할 곡목을 알려주었다. 는 평소대로 연주해 나갔을 뿐인데, 그의 연주를 처음 접한 벤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여기 더블로 더!
벤은 바텐더에게 그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여기서 꼭 밝혀두고 싶은 것은 웹스터의 테너 색소폰은 보통 것보다 구조가 특이해서, 아무도 잘 다룰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대 일류급 테너 주자들, 즉 프레즈 Prez(레스터 영 Lester Young의 애칭), 버디 테이트 Buddy Tate, 아이크 퀘벡 Ike Quebec 같은 사람들도 웹스터의 색소폰에 달려들어 봤지만, 허사였다는 사실을 이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어 시카고에서 하킴은 더 인상 깊은 일을 목격하게 된다.
비밥
이라는 새 음악을 창조해 나갈 당시, 그 배경이었던 1940년대 뉴욕은 음악사적으로도 대단히 흥미진진한 풍경들을 간직하고 있다. 다음은 디지 길레스피의 기억이다.
지금도 비슷한 사정이지만, 당시는 전시(戰時)라 아파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우리 부부에게 꽤나 그럴싸한 데가 눈에 띄었다. 집에서 연습하면 이웃들이 시끄럽다고 난리 칠 것이 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연습은 스튜디오에서 다 하고 밤에는 집에서 꾹 참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세시에 현관벨이 마구 울리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버드가 자기 색소폰을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버드는 급히 말했다.
빨리 들어가 보자고, 디즈. 방금 굉장한 것을 발견해 냈단 말이야. 꼭 자네가 들어야 돼
그날 잠들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나는 버드의 솔로를 악보에다 꼼꼼히 옮겨 적고 있었다. 불같은 성격의 버드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지금은 안 돼. 좀 있다가 날이 새면 듣지
안 돼!
버드가 고함쳤다.날 새면 다 까먹을 것 같단 말이야. 지금은 내게 고스란히 다 있어. 제발 들여다 줘
그때 아내가 자지러질 듯 외쳤다.
그 사람 내던져 버려요!
나는 그 말을 따라, 버드의 코 앞에 대고 문을 꽝 닫았다. 그러자 파커는 들고 있던 색소폰을 물더니, 복도로 슬금슬금 나가면서 방금 발견해 냈다는 그 선율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정말 굉장했다! 나는 허둥지둥 연필을 찾았다. 그리고 문 옆에 바싹 붙어서 그 선율을 받아 적어갔다. 행여 한 소절이라도 놓칠세라.
자기 몸 돌볼 줄은 모르던 파커는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마침내 1945년에 캘리포니아 주립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무렵 그는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선배 슬림 게이야르 Slim Gaillard의 인기곡 슬림의 잼 Slim’s Jam
을 취입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음은 당시 그 세션에 함께 참가했던 잭 맥비 Jack McVea의 회고이다.
그때 나는 샌디에이고 시에 있는 한 클럽에 출연 중이었다. 하루는 아내가 번호를 하나 주면서 그리로 전화해 보라는 것이었다. 말대로 전화를 걸어보니, 슬림 게이야르가 같이 좀 가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흔쾌하게 승낙하자, 슬림은 곧 왕복권 비행기표를 한 장 부쳤다.
로스앤젤레스행 티켓이었다. 마침 그날은 내가 쉬는 날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리허설도 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된 그곳 사람이 슬림에게 슬쩍 물었다.
슬림, 어쩌면 좋지?
무대 뒤에 앉아 있다가 가끔 내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라고 슬림은 태평스럽게 대꾸했다.그럭저럭 시간이 되자, 버드가 도착했다. 그런데 색소폰 리드 reed를 깜빡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 테너 색소폰에는 플라스틱 리드를 쓰지만, 사탕수수로 만든 리드 cane reed도 몇 개 갖고 다녔다.
버드는 그 사탕수수 리드를 한 번 훑어보더니만 엉뚱하게도 내 면도날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두어 번 쓱싹거리며 날을 세우더니, 자기 색소폰에다 끼웠다. 시험 연주도 한번 해보지 않고는 곧바로 무대에 나와서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마침 우리 악단이 연주를 막 시작하려던 그때였다.
당시 게이야르는 한 레코드를 제작하면서, 함께 참가한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것을 즉흥적으로 구상해 냈다. 파커를
찰리 야드버드 오루니 Charlie Yardbird O’Rooney
라고 소개한 그는 지금 자기 색소폰을 갖고 있는지도 물었다.찰리는 대답했다.
예, 지금 갖고 있는 악기는 내 것이 맞아요. 그런데 이 리드가 말썽이군요
그 말에 게임 야르가 물었다.리드가 하나도 없나요?
그 말이 정말인 것을 알고는 찰리에게 한 가지 일러주었다.맥부티 McVouty한테 한 개 있을 거요. 그걸 좀 손질해서 쓰도록 해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은 그것이 십중팔구는 게이야르의 농담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맥비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는 정말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