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볼링과 나이절 케네디 — 재즈 정신으로 재해석하는 클래식
이들 작품 최대의 특징은 재즈 뮤지션의 작품집이면서도, 재즈의 색채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클래식을 클래식 어법으로써 맞서고 싶었던 것이다.
끝으로 클래식과 재즈
라는 큰 숙제를 일반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 나가고 있는 한 재즈 스타일리스트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 Claude Bolling이 그 사람이다. 1930년 칸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때가 불과 14세. 그리고 이듬해 그는 직업적인 재즈 피아니스트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자신의 딕실랜드 악단을 이끌고 재즈 음반을 출반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팝 아티스트로서 확고한 위치를 쌓은 것이 4년 뒤인 18세 때의 일이다. 19세 때의 연주회 횟수가 5백 회를 상회할 정도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정식 음악 수업의 길을 택했다. 파리로 유학한 것이다. 그의 유학 생활 그 자체가 재즈적
이었다. 파리 음악 유학
하면 얼른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곳의 유명한 콩세르바투아르(음악원)이다. 그는 일반적인 그 코스를 따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모리스 뒤플레에게 화성학을, 앙드레 오디에로부터는 대위법과 관현악법을 배우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가 일반 학교 수업 방식을 따르지 않은 이유가 의미있고 재미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최고의 스승이 되어준 것은 앞 세대 뮤지션들이 남긴 음반들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듀크 엘링턴이다. 두 사람의 음악을 관류하는 공통점은 풍성한 관현악적 색채감
이다.
그가 결성한 재즈 피아노 트리오는 세계의 정상급 클래식 음악가들과 협연하여, 인기 정상의 음반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들의 면면을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기는 충분히 가늠된다. 핑커스 주커만 Pinchas Zukerman, 모리스 앙드레 Maurice Andre, 요-요 마 Yo-YoMa, 알렉산드레 라고야 Alex-andre Lagoya, 허버트 로스 Hubert Laws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클래식 아티스트들 가운데 볼링과 특히 두터운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이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플루트 주자인 장—피에르 랑팔 Jean — Pierre Rampal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처럼 서구의 음악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클래식─재즈 우호 관계
가 그들에게는 생활상의 실천 덕목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음대 지망생들이 적잖은 부담의 레슨에 찌들고 나서 겨우 들어간 음대에서도 그 같은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음악의 즐거움과 효용성을 체득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훌륭한 매개체가 바로 재즈다.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의 음악 학도들은 인상 깊게 말한다.
서구의 음악 학도들에게는 재즈가 일상이 돼있더라
이 훌륭한 예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산의 줄리아드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나이 즐 케네디 Nigel Kennedy이다. 특유의 앳된 외모를 채 벗어나지 못한 그 케네디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비발디의 대표작 *사계(四季)*를 파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생동감 넘치게 재해석해 낸 1991년도의 앨범 사계 덕택이다. 그 앨범은 얼마 안 되어 1백만 장이나 팔려 화제를 더했다.
한국에서는 음반은 물론, 그 제작 과정을 담은 비디오까지 인기를 끈 1991년판 사계의 그 생기 발랄한 연주를 가능케 한 토대는 무엇이었나를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클래식 음악 입문용이라 해도 좋을 그 작품과 과감히 맞설 수 있는 그 정신은 어디서 연원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부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재즈 정신
이다. 아무리 잘 알려진 클래식 작품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이렇게 본다
라고 당당하게, 그리고 즐겁게 말하고 나설 수 있게 하는 그 힘은 바로 재즈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그 증거가 케네디가 출세작인 사계를 발표하기 제법 오래전인 1984년에 발표한 앨범 나이즐 케네디, 재즈를 연주하다 Nigel Kennedy Plays Jzzz이다. 그 앨범에서 그는 찰리 파커에서 스티비 원더까지, 재즈의 명곡 일곱 곡을 피아노만의 반주로 재해석해 내고 있다. 그 앨범은 단순히 케네디 개인의 취향은 아니다. 실제로 그 같은 추세, 즉 정통 클래식과 재즈의 행복한 공존
은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즉, 그들의 문화적 두께에서 자연히 우러난 산물이다. 특히, 구미의 클래식 음악 학도들에게 재즈란 음악을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장르이다.
그런데 1990년대의 한국에서는 클래식 명곡의 재즈화
가 무원칙의 수위에 달해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아류들이 상품화되어 적잖이 유통되고 있는 현상이 목격된다. 그 현상은 한국에서 재즈의 대중적 확산 추세와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한다.
예를 들어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 비제의 아를르의 여인처럼 일반인들의 귀에 익은 것——제목은 모르더라도, 어디에선가 분명 적어도 한 번은 들은 것 같은 명 클래식 소품——이라면 낭만주의 작품들까지도 재즈로 편곡되어 상품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같이 새롭고, 듣기에 좋으면 그만
이라는 식의 발상은 주로 일본 쪽에서 유입되어 왔다. 그들이 기대고 있는 바는 복잡함, 진지함, 무거움 같은 데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인의 심리
이다. 참으로 위험천만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훌륭한, 그리고 생명력 있는 예술이라면 다 그렇듯, 참〔眞〕재즈 역시 결국에는 논리의 산물
이기 때문이다. 유추 analogy 행위
또는 그럴싸해 보임
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클래식 선율이니까 더 상큼하게 재즈로 편곡해서 상품화해 낸다는 식의 편의주의적이고 나아가 상업주의적인 발상이 그러한 행위이다.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되어 온 문화를 밑에 깔고 있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시리즈로 발매되고 있는 이 음반의 앨범 타이틀은 도시의 클래식 시리즈 Urban Classic Series이다. 일본에서 직수입되어 들어왔다. 그 덕분
에 일본의 가나 문자 인쇄가 겉표지에도, 속 해설지에도 그대로 선명하다. 바로 뒤에는 Jazzで聴くアーバンクラシック(재즈로 듣는 도시의 클래식)
이라는 일어 부제도 잇따른다.
국내 굴지의 음반 회사가 수입 • 공급하고 있다는 친절한
스티커가 겉면에 붙어 있다(수입 공급원 :(주) 00 00
이라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은 재즈가 국내에서 유통─확산─소비되고 있는 그 무원칙한 단면을 잘 드러내 주는 일례에 불과하다.(얼마 뒤, 이 앨범은 그 왜색
을 벗고 진열대에 다시 선보였다. 가나 문자를 모두 없앤 한글판 껍데기를 새로 입혀 나온 것이다. 재발매에서는 왜 그 왜색
을 벗어던졌는지 곰곰 생각해 보게 한다.)
예술
이라는 이름 아래 생산되어 나오는 그러한 식의 작품들은 잘 통제되지 못한다면, 결국 재즈의 기본
에 대한 성찰을 뛰어넘은 소재주의
의 산물이 되기 쉽다.
그 원칙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에의 추구
로 요약된다. 1980년대 이후 생겨나서 굵은 줄기를 이루는 여러 조류의 명칭에서부터, 그 점은 강하게 시사된다. 밥 정신에로의 회귀를 외치고 있는 고전주의
와 신고전주의
, 프리 재즈를 펑키하게 변형시킨 프리 펑크
, 세계의 오지들로부터의 음악에 귀 기울이자는 월드 뮤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것
이라고 단언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작품을 재즈로 재생산해 내는 작업은 그 같은 시대적 흐름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참으로 작은 지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