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자렛의 두 얼굴 —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를 넘나드는 천재

재즈와 클래식, 그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음악 세계를 개척한 천재 뮤지션 키스 자렛의 특별한 여정을 조명한다. 원전 악기로 바흐를 연주하는 그의 독특한 시도와, 재즈로 클래식을 재해석한 LA4, 그리고 브랜포드 마설리스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거장들의 음악적 탐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In a nutshell

    키스 자렛의 두 얼굴 —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를 넘나드는 천재

키스 자렛의 두 얼굴 —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를 넘나드는 천재

이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초점을 한 〈유별난〉 천재에게 집중시키자. 정상급 재즈 뮤지션이면서 동시에 진지한 클래식 아티스트이기도 한 키스 자렛이 그이다. 그의 주된 관심 역시 바흐의 작품들이다.

앞서 든 예들은 〈재즈로 해석한 클래식〉인 점에서 모두 하나로 묶일 수 있다. 그러나 자렛의 경우, 그 작업은 차원을 달리한다. 그 시대의 악기, 즉 〈원전 악기〉를 완벽하게 구사해 내는 것이다.

자렛이 클래식 혹은 클래식적인 작품을 연주할 때는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를 굳이 고집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그의 __유별남__이다. 이제는 웬만한 연주회가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바로크 시대의 원전 악기를 실로 완벽한 수준으로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들어 세계 클래식계를 본격적으로 휩쓴 __고음악(AlteMuzik)__의 이념 • 실천 방식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크 루시에와 오이겐 치체로 등의 경우, 그들의 악기는 오늘날 흔히 보는 피아노—더 정확히는 함머 클라비어(Hammer Klavier)—라는 근대 악기이다.

자렛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정격(正格)으로 연주하는 클래식 곡들은 바로크 시대, 그중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는 바흐의 작품들이다. 바흐의 걸작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는 61분 39초에 걸친 하프시코드 독주가 빛난다(1989년, ECM). 또, 『리코더 소나타』(6곡)에서는 덴마크 태생의 정상급 여류 리코더 주자 미칼라 페트리(Michala Petri)의 연주를 하프시코드 반주로 받치고 있다(1992년, BMG). 그녀와는 헨델의 소나타 합주도 같은 레이블로 취입했다.

ECM에서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발표되자, 그에게 호평과 찬사가 비 오듯 쏟아졌다. 그 일로 그는 클래식에 더욱 주력하게 된다.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한 음 한 음 음미하는 듯한 유장한 템포로 하프시코드 특유의 섬세한 음색을 더욱 매력적으로 배가시켜주기도 한 명연주이다. 그 유장한 호흡은 글렌 굴드 이후 거의 정식화하다시피 한 빠른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대비되는 것이어서, 더욱 이채를 띤다.(참고로,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30, 40분대였다.)

또 오늘날에는 그 모습조차 보기 힘든 고악기(古樂器) 클라비코드 역시 자렛의 탐구 대상이다. 하프시코드보다 더 구경하기 힘든 그 악기로 그는 무려 1시간 41분에 달하는 솔로 자작곡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천길, 만길 Book Of Ways」(1987년, ECM).

이쯤 되면, 자렛의 본령이 재즈인지 아니면 고음악 전문의 클래식 뮤지션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자, 그렇다면 그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그의 약력을 살펴보자.

1945년생인 그는 세 살부터 피아노를 쳤고, 열다섯 살 때는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대로 접어들어, 직업 피아니스트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1970년대에 그는 솔로이스트로서, 또한 저 유명한 정통 재즈 그룹 〈키스 자렛 트리오〉의 리더로서도 성가를 높여갔다.(베이스 :개리 피콕 Gary Peacock, 드럼 :잭 두 조 네트 Jack DeJohnette.)

재즈 트리오 공연 때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그 선율을 입으로도 허밍하는 독특한 연주 방식이다. 연주가 점점 뜨거워지면 그 소리는 신음이나 절규 같은 괴성으로 변하기도 하여, 절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는 연주와 작곡, 이 두 분야에 걸쳐 모두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현대 음악의 신기원을 개척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재즈 피아니스트, 클래식 피아니스트, 일급 하프시코드 주자, 이것들 모두가 그의 주요 타이틀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정통 클래식 쪽에서는 자렛의 연주를 두고 〈핑거링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흠을 잡아내기도 했다. 일반 애호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이러한 평가는 자기 고유의 영역을 침해당한 데 대한 〈원주민〉의 볼멘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그에 대한 재즈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전 세계에 걸쳐 그가 클래식 공연을 펼친 곳 중 대표적인 곳만 얼핏 꼽는다 해도,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토론토, 부다페스트, 스톡홀름 등지이다. 또 아시케나지, 데이비스, 가디너, 호그우드 등 세계적 지휘자들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서도, 해외 클래식 음악계에는 이미 낯익다. 자렛이라는 한 거장에 이르러, 재즈와 클래식의 구분은 이렇듯 무의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또, 네 명의 중견 재즈맨들로 이뤄진 그룹 〈LA4〉〈클래식의 재즈화〉라는 테마에서 빠트릴 수 없다. 이 그룹을 리드해 나가고 있는 사람은 클래식 기타의 라우린도 알메이다 Laurindo Almeida이다. 그를 받쳐주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 역시 만만찮다. 한국 등 동양권에서 특히 그 지명도가 높은 베이스의 레이 브라운 Ray Brown, 그리고 색소폰과 플루트의 버드 섕크 Bud Shank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76년에 발표한 앨범 『아랑페즈 협주곡 Concierto de Aranjuez』에서였다. 호아킨 로드리고의 너무나도 유명한 기타 협주곡을 주제로 차용한 곡이었다.

2년 뒤, 그들은 그 같은 주제를 좀 더 심화시킨 앨범 『우리는 친구 Just Friends』를 발표했다. 그 앨범에서는 「아랑페즈 협주곡」을 재즈로 더 다듬어 「스페인 Spain」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았다. 또, 바흐의 「서곡 C단조」에서 만든 「우리 시대의 바흐 Nouveau Bach」는 그들이 〈클래식의 재즈화〉라는 과제를 그들 나름으로 확대 •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중 리더인 알메이다에 대해서는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8년생으로, 고희를 훨씬 넘겨서도 엄정하면서도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그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 가지 명제로 족하다. 〈브라질 음악에 재즈를 도입했고, 재즈에 브라질 음악을 도입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1992년, 그는 새 멤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에서의 실황을 모아 『다시 한번(Outra Vez)』이라는 이름의 앨범으로 펴 냈다. 고령이지만, 젊은 시절의 그 화려한 클래식 기타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거기서, 그는 과거의 혈기를 회상하듯 카를로스 조빔의 유명한 삼바와 보사 노바 곡 몇 곡을 고즈넉하게 들려주고 있다.

물론, LA4가 추구했던 것, 즉 〈클래식 같은 재즈, 재즈 같은 클래식〉에의 추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클래식 곡을 단순히 재즈로 〈번역〉해 내는 차원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굳이 클래식 팬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곡인 베토벤의 「월광」과 재즈 팬이라면 다 알고 있는 셀로니어스 몽크의 「한밤중, 그 무렵 RoundMidnight」을 교묘하게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제목을 「베토벤과 몽크 Beethoven & Monk」로 붙였다. 그는 또, 드보르작이 지은 「신세계 교향곡」의 친숙한 테마도 재즈로 해석해 내기도 했다.

또,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제1의 트럼페터 윈턴 마설리스의 형인 브랜포드 마설리스는 1986년 자신의 색소폰으로 낭만주의의 명곡 13곡을 연주하여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포레의 「파반느」,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사티의 「짐노페디」, 라흐마니노프의 「보컬리즈」,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등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곡들이다. 반주는 세계 정상의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