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재료다 — 80년대 재즈, 경계를 허물고 세계의 음악이 되다

1980년대, 재즈는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ECM의 변화부터 월드 색소폰 쿼텟의 등장까지, 모든 음악적 요소를 재료 삼아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의 음악'으로 비상한 포스트모던 재즈의 찬란한 시대를 조명한다.

  • World Saxophone Quar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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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27, 2025

In a nutshell

    모든 것은 재료다 — 80년대 재즈의 열린 세계관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모든 것은 재료다 — 80년대 재즈의 열린 세계관

이로써 ECM은 특정 지역 아티스트의 특정 스타일만을 고집하는 레이블이라는 비판도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 후 ECM은 AEC(Art Ensemble of Chicago) 같은 미국 출신의 아티스트들과도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ECM 진영의 비평가들조차도 혼돈스러운 지경이 되었다. 실제로 그 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ECM은 재즈의 여러 유파들을 최대한 수용한다는 쪽으로 체제를 일신했다.

이 시대, 미국 재즈는 어떠했는가?

다락방 운동의 바람을 몰고 왔던 그 세대가 이제는 재즈의 기득권층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음악이 이제는 나긋나긋한 방향으로 바뀌는 중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초기의 싱싱한 기운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그러한 음악상의 변화를 먼저 즉각 감지해 내는 쪽은 이 경우에도 청중들이었다. 이 점은 재즈사를 통틀어 언제나 그래 왔다.

그러한 변화를 선도한 주체가 월드 색소폰 쿼텟(World Saxophone Quartet, WSQ)이다. 그들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탄생한 그룹 가운데 진취적 그룹들 대부분이 WSQ의 작품을 자기들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다는 사실이 이 점을 웅변해 주고 있다.

그들이 자기 고유의 어법을 확장해 내기 위하여, 각자 개성을 서로 존중해 가며 쏟고 있는 다양한 노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서 블라이드는 초기 스윙 재즈를, 빌리 뱅은 서민적인 길거리 음악의 흥겨움을, 칼라 블레이는 풍자 코미디 같은 세련된 재즈를 각각 파들어 갔다. 데이비드 머레이는 훌륭한 8중주단과 다채로운 빅 밴드,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이끌어가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 모두가 강조한 것은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질이었다.

1980년대 초는 이들 신생 재즈들이 각자 자기 입지를 다듬느라 분주하던 시기였다. 두서 없이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던 이들 음악적 혁명가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발돋움하던 1980년대, 그 1980년대에 재즈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음악으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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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이후부터 재즈 드럼계의 선두를 쭉 지켜오고 있는 빌리 모범(1988년 걸작 모음집에서).

이 과정에서 미국은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 그간 재즈에서 당연히 누리고 있던 재즈의 맏형 노릇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미국 일변도였던 재즈 헤게모니가 위협받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재즈에서 하나의 뚜렷한 주류를 잡아내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그만큼 다양한 관점과 기법들이 가지를 뻗어 나와, 어떤 경우는 극에서 극으로 달리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 당연시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 유럽 재즈에서는 자유 즉흥 재즈가 강세를 누리게 된다. 그 재즈는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오면, 그 위세가 형편없이 축소된다. 미국 뮤지션 가운데 거기에 영향받은 사람은 트롬본 주자 조지 루이스, 트럼펫의 레오 스미스, 기타리스트 프레드 프리스 등 단 세 명이 전부이다.

재즈는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단 하나의 선도적 스타일이란 없어지고 만 것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뮤지션들

  1. 레이 앤더슨 Ray Anderson: (미)(1952 -) 트롬본, 튜바, 타악기, 보컬, 작곡.
  2. 빌리 뱅 Billy Bang: (미)(1947-) 바이올린, 드럼, 플루트, 작곡.
  3. 조지 벤슨 George Benson: (미)(1943 -) 기타, 보컬.
  4. 랜 블레이크 Ran Blake: (미)(1935-) 피아노, 키보드, 작곡.
  5. 해미엣 블루엣 Hamiet Bluiett: (미)(1940-) 바리톤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
  6. 아서 블라이드 Arthur Blythe: (미)(1940-) 알토•소프라노 색소폰, 작곡.
  7. 개리 버튼 Gary Burton: (미)(1943 -) 비브라폰, 피아노, 오르간, 작곡.
  8. 스탠리 클라크: Stanley Clarke (미)(1951-) 베이스, 전자 베이스, 첼로, 키보드, 지타(인도 민속 악기), 타악기, 보컬, 작곡.
  9. 빌리 모범 Billy Cobham: (파나마)(1944-) 드럼, 타악기, 작곡.
  10. 스티브 콜먼 Steve Coleman (미)(1956-) 알토•소프라노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 보컬, 타악기, 작곡.
  11. 조지 듀크 George Duke :(미)(1946-) 피아노, 클라리넷, 오르간, 신시사이저, 작곡.
  12. 비야체슬라프 가넬린 Vyacheslav Ganelin: (구소련)(1944-) 피아노, 베이스, 기타, 오르간, 트럼펫, 타악기, 작곡.
  13. 얀 가바레크 Jan Garbarek: (노르웨이)(1947-) 베이스, 소프라노 • 테너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 작곡.
  14. 허비 행콕 Herbie Hancock: (미)(1940-) 피아노, 전자피아노 오르간, 신시사이저, 작곡.
  15. 키스 자렛 Keith Jarrett :(미)(1945-) 피아노, 소프라노 색소폰, 리코더, 드럼, 작곡.
  16. 올리버 레이크 Oliver Lake: (미)(1942-) 알토•테너 • 소프라노 색소폰, 플루트.
  17. 존 매클로플린 John McLaughlin: (영)(1942-) 기타, 피아노, 신시사이저, 작곡.
  18. 윈턴 마설 리스 Wynton Marsalis: (미)(1961-) 트럼펫, 작곡.
  19. 팻 메시니 Pat Metheny: (미)(1954-) 기타, 작곡.
  20. 데이비드 머레이 David Murray: (미)(1955-) 테너• 소프라노 색소폰,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 작곡.
  21. 에번 파커 Evan Parker: (영)(1944 —) 테너 • 소프라노 색소폰, 자동 하프.
  22. 코트니 파인 Courtney Pine: (영)(1964-) 테너 • 소프라노 색소폰, 클라리넷.
  23. 샘 리버스 Sam Rivers: (미)(1930-) 테너 • 소프라노 색소폰, 베이스클라리넷, 플루트, 피아노, 비올라, 작곡.
  24. 테리예 리프달 Terje Rypdal: (노르웨이)(1947-) 기타, 전자 기타, 신시사이저, 오르간, 피아노, 소프라노 색소폰, 타악기, 작곡.
  25. 소니 샤론 Sonny Sharrock: (미)(1940-) 기타, 보컬.
  26. 헨리 스레드길 Henry Threadgill: (미)(1944-) 알 타우 테너 • 바리톤 색소폰, 플루트, 베이스 플루트.
  27. 매코이 타이어 McCoy Tyner: (미)(1938-) 피아노, 작곡.
  28. 웨더 리포트 Weather Report: (미)(1971- 1982) 조 자비눌(키보드), 웨인 쇼터(색소폰), 미로슬라브 비투스(베이스), 알폰스 무존(드럼), 에어로 모래이라(타악기).
  29. 토니 윌리엄스 Tony Williams: (미)(1945-) 드럼, 작곡.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즈는 한 가지 스타일로 규정되지 않는다. 스윙 시대니 밥 시대니 하는 식의 시대 구분법이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재즈는 끊임없이 분화될 뿐 아니라, 초월에 초월을 거듭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재즈는 통합적이고 절충적으로 발전하는 경로를 택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스타일들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공존했던 현상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어느 특정 스타일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는 일 자체가 바로 1980년대 재즈의 스타일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재즈의 최대 과제라면 여러 스타일 사이의 경계 넘나들기였다. 덕택에 재즈는 그만큼 더욱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한마디로, 재즈가 본격 포스트모던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의 재즈에는 하나의 뚜렷한 주도 장르가 있어서 명확한 시대적 구분이 가능했다. 즉, 가장 최근 들어 개발된 양식이 최신형일 뿐만 아니라, 앞 세대의 재즈에 비해 또한 더 이해할 만한 음악이라고 보아도 그때는 무방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의 재즈에는 이 같은 통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재즈 양식(하드 밥, 비밥, 스윙, 뉴올리언스 재즈), 심지어는 그 이전의 어떤 음악에서건 재즈적인 요소가 발견된다면 모두 다 수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음악적 수단들이 재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진정으로 열린 세계관, 즉 모든 음악 양식과 장르는 서로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포스트모던 재즈는 존립한다. 1980년 이후, 재즈의 양상을 결정해 오고 있는 요소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재즈라는 음악이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모든 음악 요소들이 일거에 우리 시대 재즈 뮤지션들의 활용 가능한 재료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재즈는 이같이 다양한 음악 유산과의 밀접한 교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동시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재즈는 이렇듯 천차만별로 다양해진 재즈 스타일을 관류하는 __그 무엇__을 탐색한다. __재즈적 가치__에 대한 탐험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3. 1980년대 재즈의 성패는 __인용 기술 the art of quotation__에 달려있다. 앞 시대의 재즈 스타일들이 잘게 쪼개져 또 하나의 재즈로 묶여 나온다. 이 시대의 드러머 데이비드 모스가 말했듯, 포스트모던 재즈는 __연결 고리 hyphen의 음악__이다.

이전 세대의 재즈에서는 아무리 걸출한 뮤지션이라도 단 하나의 스타일을 정복하는 데에는 평생이 걸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음악인들은 몇 가지 스타일과 거기에 맞는 각각의 연주 방식을 한꺼번에 정복해 낸다. 특히 뛰어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솜씨가 너무나 초인적이므로, 단 하나의 스타일로 분류한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인도의 민속 악기인 타블라(tabla)와 시타(sitar)의 명인 콜린 월콧은 __나는 중심을 잃고 헤매는 사람 같다__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즉, 자기는 인도 음악가도, 정통 재즈 스타일리스트도, 살사(salsa) 음악가도, 아프리카 타악기 주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말하라면 아무도 없는 땅에서 이들 영역 사이를 왔다 갔다 헤매는 사람 같다는 고백이다.

__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음악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 즉, 조금 조금씩 아는 것의 가짓수는 많은데, 어떠한 특정 사항으로 들어가면 최소한의 지식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__고 그는 말했다.

알토 색소폰 주자이자 작곡가인 존 존 John Zorn의 말은 또 이렇다. “내 또래의 음악인들은 음악에는 위계질서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재즈 위에는 보다 더 고상하고 복잡한 음악——예를 들면 클래식——이 있으며, 재즈는 블루스보다 한 단계 더 복잡하고 고상하며, 또 블루스는 팝 음악 위에 있다는 식의 통념을 파기한 것이다. 결국, 음악은 서로 모두 다 같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모두 각각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재즈 뮤지션들은 그래서 “양식적 순수 stylistic purism를 고집하는 것은 예술적 기만”이라고까지 당당히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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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뮤지션으로는 드물게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 그가 기타 치며 부른 몇몇 노래는 빌보드 차트의 상위권을 석권하기도 했다. 그 인기는 재즈와 팝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크로스오버적 성향에서 비롯한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재즈는 “이것 아니면 저것 either-or”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재즈가 믿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both-and”의 세계관이다. 1980년대의 재즈가 구가하는 자유는 선택의 자유, 가능성의 자유이다. 피아니스트 안소니 데이비스는 포스트모던 재즈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압축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요소들 모두 다 창작의 재료로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