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건너간 자유의 함성, 그리고 히피 문화 속 재즈
당시의 미국 문화는 히피 문화의 대대적 반란(flowerpower rebellion)
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그 여파는 팝 문화 쪽으로는 대단했으나, 재즈에는 거의 영향을 못 미쳤다. 당시 미국의 재즈는 비브라폰 주자 개리 버튼이 이끄는 5중주단의 세련미, 알토 색소폰 주자 존 핸디의 머리에 꽂은 꽃다발처럼 유머러스한
음악, 테너 색소폰의 찰스 로이드로 대표되는 히피식 사랑 파티(love-in)의 천진함이 짙게 밴 음악 일색이었다.
그들의 음악에는 그때까지 재즈의 유산이 모두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봤을 때, 이 시기의 미국 재즈 뮤지션치고 음악의 전체적 흐름에 이렇다 하게 기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즈의 기(氣)가 일거에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흘러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격류에서 구식 재즈인 하드 밥은 찬밥 신세
로 밀려나고 말았던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중앙 무대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내주지 않았다. 당시 음악의 흐름을 선도한 것은 프리 뮤직 운동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들의 길을 계속해서 추구해 나간 원로 재즈 뮤지션이 두 사람 있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차원이지만, 밴드의 멤버들을 서로 맞바꿔 보기도 하는 등 서로 간에 교류를 돈독히 다져 나갔다.
실질적 의미에서 빅 밴드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앞 세대 빅 밴드의 두 거장 듀크 엘링턴과 카운트 베이시의 명성은 1950년대 말까지도 건재했는데, 특히 엘링턴의 경우에는 끊이지 않고 훌륭한 곡들을 발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엘링턴 밴드를 제외한 다른 빅 밴드들은 자신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음악 쪽으로만 파고드는 데 그쳤다. 빅 밴드 재즈는 그야말로 빈사 상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