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암스트롱(2)

아닌게 아니라 1940년대 루이스 암스트롱이 보인 음악적 변화를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긴 하지만 재즈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자면 충분히 수긍되는 차원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뉴 올리언즈 재즈에 대한 열광은 걷잡을 수 없는 추세였는데, 1940년 시드니 베셰와 함께 치렀던 어느 소규모 세션에서 암스트롱이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Down In Honky Tonk Town’과 ‘Coal Cart Blues’ 같은 곡에는 왕년의 블루 파이브 시절에 버금가는 환호가 빗발쳤다. 고수들끼리의 연주 경쟁은 맛뵈기 차원이 아니었으며 문자 그대로 불꽃이 튀었다.
암스트롱은 1946년 빅 밴드 운영에도 처음으로 손을 댔는데 유쾌한 뉴 올리언즈 스타일을 내세운 밴드로서, 영화 ‘뉴 올리언즈’의 촬영을 위한 악단이었다. 이 같은 현실적 이유 말고도 암스트롱과 측근들은 변화에 적응해 나가게 되는데 이듬해 뉴욕 타운 홀에서 가졌던 올 스타즈의 데뷔 무대가 그 열매였다.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만 첫 무대에서의 스타일이 향후 올 스타즈 활동 내내 변함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뉴올리언즈 앙상블 특유의 집단 즉흥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애초 없었다. 암스트롱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연주 방식이란 무대에서 의식적으로 선보이기 오래 전부터 실행되어 왔는데 잭 티가든이나 피너츠 후코 같은 노장들 또한 의식적으로 익힌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 셋이야말로 내로라하는 솔로이스트였는데 그 중 특히 재즈의 발전사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암스트롱의 창법과 노래가 세상을 풍미했던 것이다. 1947년 바니 비가르가 클라리넷을 맡고, 이듬해 얼 하인스가 피아노를 맡게 되면서 그 편성은 한층 더 윤택해졌는데, 결정타는 얼 하인스가 피아노 좌석에 앉게 된 일이었다. 1951년의 ‘Indiana’와 ‘That’s A Plenty’는 솔로의 향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