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오넬 햄프턴

일반적으로 햄프턴이 재즈 비브라폰의 원조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드러머로서였다. 드럼 기술의 일인자라고 일컫기는 좀 뭣하지만 스윙감과 밴드 내에서 스윙이란 것의 비중과 역할에 대한 천부적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엔터테이너로서 그 같은 쇼맨십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는데 그가 컬버 시티의 리틀 카튼 클럽에서 얼굴 마담으로 유명세를 타더니 폴 하워즈의 악단 콸러티 세러네이더스에서 레스 하이트 오케스트라 등으로 옮기며 특별 출연자로 명성을 떨친 이유다.
루이스 암스트롱이 하이트 밴드의 얼굴로 나설 때조차도 햄프턴의 Ding Dong Daddy 드럼 독주가 단연 주목을 끌었을 정도다. 바로 그의 출세작이었다. 드러머였던 그가 비브라폰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였다. 1930년 그는 Memories Of You로 본격 비브라폰 주자로 변신한 그는 2년 뒤 LA의 코튼 클럽에서 자기 이름의 첫 빅밴드를 선보였다. 그때, 햄프턴에게 손 내민 사람이 베니 굿맨이었다. 음반 취입을 목적으로 테디 윌슨, 진 크루파까지 합쳐진 새 트리오가 그렇게 탄생했다.
햄프턴의 드럼에게로 즉각 반응이 왔다. 햄프턴이 드럼으로 토해낸 스윙은 그의 비브라폰으로 직역되었는데 그 원활한 통역을 실현시켰던 요체가 기민한 즉흥 기술이었다. 특히 그의 천부적 블루스 감각이 빛났던 Blues In My Flat과 Vibraphone Blues에 충격을 받은 굿맨은 “당장 벤드를 집어치우라”며 동행을 종용했다. 굿맨의 사이드맨이 된 햄프턴은 1940년까지 빅 밴드에서는 물론 실내악 캄보에서도 돋보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민하게 상황을 알아차린 빅터 레코드는 기민하게 햄프턴에게 본인의 이름 아래 음반 재량권과 단원 선발권을 허여했다. 결과는 매우 흡족했다. 자니 핫지스, 로런스 브라운, 츄 베리, 쿠티 윌리엄스, 허쉴 에번스 등의 유능한 뮤지션들을 사이드맨으로 둘 수 있었던 덕에 햄프턴에게는 재즈 사상 최상의 창작 조건이 주어진 셈이었다.
1940년 굿맨과 결별한 햄프턴은 자기 이름을 내건 악단을 이끌어야 한다는 버거운 과제와 다시 부딪혔다. 그러나 1942년 그의 첫 빅밴드 이름으로 발표했던 Flying Home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50년대 직전까지 그 여세를 몰아가게 되었다. 일리노이 자케, 덱스터 고든, 밀트 버크너 등 유능한 주자들에도 불구하고 햄프턴은 피아노 연주 스타일보다 방아쇠 주법(trigger finger) 등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식의 연주에 호소하게 되었다.
마침내 빅밴드 비즈니스가 쇠락해지자 그는 자신의 단촐한 밴드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1955년 영화 베니 굿맨 스토리 중의 1940년대 대목에서 자신이 재조명된 것을 계기로 그는 밴드 활동을 재개해 향후 10년간을 세계 순회 연주길에 올랐다. 우수한 신예들을 위한 사업들을 궁리하던 1960년대 중반, 그는 Jazz Inner Circle이라 이름한 소편성 그룹 활동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는 햄프턴 빅밴드의 정체기였다. 그러나 바로 그 이후 그는 4대륙을 넘나들며 재즈의 전도사를 자임했다. 자신의 밴드에서 1980년대까지 특출한 솔로이스트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냈다.
빅밴드 리더로서 쌓은 명성과 별도로 그에게는 소편성 그룹 리더로서의 중요한 녹음 활동이 있었다. 그는 아트 테이텀과 최상의 궁합을 과시했다. I’ll Never Be The Same에서 과시했던 피아노와의 장엄한 듀엣, Makin’ Whoopie에서의 눈부신 경합은 소문에 값했다. 햄프턴의 스윙, 그의 인간적 매력은 오늘날까지도 재즈 정신을 축약한 것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