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그라펠리

첫 취입을 끝낸 1934년, Quintet Of The Hot Club Of France의 장고 라인하르트와 콤비를 이뤄 모습을 드러냈던 그라펠리(Grappelli이지만 당시 표기는 Grappelly)가 향후 던진 영향은 엄청났다. 일찌기 음악에 발을 들였던 그는 이미 10대에 바이올린으로 명성을 떨쳤던 주인공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짙게 드리웠던 때였다. 나머지 단원들은 조국 프랑스로 돌아간 뒤였지만 그라펠리는 계속 영국에 남아 있었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그라펠리는 장고 라인하르트와 자신을 묶어주던 마법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 이후 의도치 않게 솔로의 길을 걷게 된 그는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 지역의 재즈 페스티벌이라면 어디든 마다않던 그는 옛 파리의 태평성대를 소환하는 주인공으로 명성을 누렸다. 더욱이 그로 인해 재즈맨은 나이가 들면 거의 발전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불식되었다. 어려서부터 과도한 훈련을 받아 30대에 접어들면서 어깨 부위에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결국 그만의 독특한 연주법으로 귀결됨으로서, 예기치 못 했지만 그라펠리 특유의 블루스 필링이 빛을 보게 되었다.
1966년에는 그라펠리 음악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특별한 녹음 기획이 수립되었다. 격정정인 연주로 이름을 날리던 재즈 바이올린 주자 스터프 스미스, 전기 바이올린의 장 뤽 퐁티와 스벤드 아스무센 같은 진보적-전위적 뮤지션들과의 급진적 듀엣에서도 그라펠리는 자기 스타일을 견지했다. 비브라폰의 게리 버튼, 트럼펫의 빌 콜먼, 피아노의 롤런드 해나 등과의 듀엣으로 그는 흔들리지 않는 연주력을 재확인시켰다. 거장 예후디 메뉴힌은 그라펠리와의 협연 후 “내가 존경하고 함께 하고픈 벗”이라는 평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