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 굿맨 — 클래식과 재즈를 아우른 거장

그는 닳아빠진 유행가 마저도 영롱한 순수 예술품으로 빚어냈다.

  • Benny Go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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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c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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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굿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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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으로서 베니 굿맨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1930년대 후반에는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언어로 상찬이 쏟아지더니 뉴 올리언즈 리바이벌(1940~50년대) 때에는 최악의 저주가 퍼부어졌다. 평단의 케케묵은 관용어이긴 하지만, 진실은 그들 극단 사이에 있다.

벤자민 데이비드 굿맨이 드러머 벤 폴락과 함께 자기 이름을 밴드에 처음으로 얹어 쓴 것은 1920년대 후반이었다. 이 일로 굿맨은 유능한 솔로이스트로 인정받고 녹음 일정에 대한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음색이 여리고 타이밍은 신경질적이기까지 했지만, Shirt Tail Stomp, 8Clarinetitis 같은 곡들을 통해 선율을 축조해 나가는 탁월한 능력을 입증하기에 족했다.

그는 프로페셔널리즘의 화신이었다. 일찍이 1930년대 초반기에 프리랜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지명도를 확보한 그는 1934년이 되자 자신의 빅 밴드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빅 밴드의 행보는 때로 상업주의적 요구에 유화주의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은 또한 스윙 재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드디어 스윙의 황제 (King Of Swing)로까지 불리게 된 굿맨은 플레처 헨더슨, 베니 카터, 에드가 샘프슨 같은 편곡자들의 도움으로 당시의 유색인 악단보다 더 명성을 누렸다. 1938년의 카네기홀 공연은 재즈의 이정표적 사건이었지만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굿맨에게 진정 의미있었던 것은 3인조에서, 특히나 주목할만한 6인조까지의 소편성 악단 편성으로 만들어진 음악이었다. 피아노에 테디 윌슨, 비브라폰에 라이오넬 햄프턴, 드럼에 진 크루파 등으로 구성된 4인조는 My Melancholy Baby, Ding Dong Daddy처럼 닳아빠진 유행가 마저도 영롱한 순수 예술품으로 빚어냈다. 특히 보다 세계적인 사운드를 지향했던 6인조의 음악은 순수 실내악에 버금갔다. 찰리 크리스천의 기타가 가세했던 Seven Come Eleven, 트럼페터 쿠티 윌리엄스가 특별 출연한 Breakfast Feud는 모두가 걸작품이었다.

비밥과의 인연은, 탐색전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5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주 정부 지원 규모의 여러 해외 무대를 통해 적극적 관심을 표했다. 60년대에는 호화 식당 레인보우 그릴과 60년대 말의 카네기홀 무대의 스타였다. 70년대 들어서는 무대의 단골 재즈맨으로 인기를 끌더니 세상을 뜬 1986년까지 무결점 연주인으로서 명망을 지켰다.

1938년 이후, 굿맨의 새 경력에는 클래식 클라리넷 주자라는 것이 추가된다.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단과의 취입에 이어, 헝가리의 현대 음악 작곡가 벨라 바르톡의 실내악 Contrasts 연주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객원 협연에 이어 아론 코플런드와 파울 힌데미트 같은 현대 음악 거장들의 클라리넷 협주곡 위촉작들을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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