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크리스천

어떤 음악적 혁신이 실제적으로 유용하게 발휘되려면 생겨난 때의 음악 상황과 잘 맞물려야 한다. 재즈에서 기타라는 악기의 의미가 본격 부각된 것은 리듬 파트의 역할에 무게 중심의 변화가 모색되면서 심벌즈의 기술이 기타의 다양한 리듬을 대체할 방식이 다채롭게 모색되던 1930년대 후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기타가 살아남으려면 독주 악기로 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통상적인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라면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어떻게든 자기 악기의 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하려 안간힘을 썼다. 플로아드 스미스(앤디 커크 악단의), 에디 더햄(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등이 음향 증폭의 선구자로 기록된다.
텍사스 출신의 찰스 크리스천은 열두 살 나이에 기타를 잡기 전에는 트럼펫을 불었다. 1930년대 이전까지는 친척의 악단이었던 안나 메이 윌번에서 제임스 심슨과 함께 공동 리더로 연주했다. 1938년에 알폰소 트렌트의 지역 악단에 적을 두고 있을 적에 그의 전기 증폭 기타를 눈여겨보고 있던 존 해몬드의 소개로 베니 굿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굿맨은 단박에 그를 알아 보았다. 머잖아 굿맨의 6중주단과 빅 밴드를 활동 부대로 갖게 된 그가 빛을 발한 곳은 소편성 쪽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하한 종류의 템포에서도 그의 스윙은 빛났으며 블루스 감각은 거장적이었다. 그를 기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굿맨에게 기용되어 있으면서도 크리스천이 놓지 않았던 것은 클럽 민튼즈 플레이하우스에서의 근무 외 잼 세션(after-hours jam session)이었다. 훗날 ’비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새로운 재즈 스타일이 배태되던 곳이었다. 거기서 크리스천은 그 스타일의 선구자라는 대접을 받게 될 만큼 역할은 탁월했다. 실제로 스윙 뮤지션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의 솔로 연주는 아트 테이텀에 비견될 만한 인터벌 감각, 실로니어스 몽크를 연상케 하는 모더니스트적 리프로 각인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결핵의 병력을 갖고 있었던 크리스천은 재즈 뮤지션이라면 피할 수 없었던 심야 활동까지 겹쳐 건강이 망가졌다. 1941년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결핵 요양소 입원이 내려진 그는 구상 중이던 새 음악을 제대로 실험해보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2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