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 카터

알토(색스), 클라리넷, 트럼펫의 달인으로서 일급의 작곡과 편곡 솜씨까지 갖추었던 베넷 레스터 카터는 능력에 걸맞게 일급 밴드를 여럿 거느렸다. 만일 그 중 하나에만 매진했더라면 주류 재즈의 거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에 편곡 작업으로 함께 일했던 인물이 쥰 클라크, 호레이스 헨더슨, 플레처 헨더슨, 찰리 존슨 같은 실력자들은 물론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듀크 엘링턴까지 망라했다. 1931년에는 클럽 코튼 피커스의 음악 감독을 비롯해 칙 웹, 밀스 블루 리듬, 테디 힐 심지어 거장 베니 굿맨 같은 거물까지 그의 편곡 실력에 손 내밀 정도였다.
카터가 자신의 밴드를 이끌었던 것은 1933~34년이었는데, 순수 미국인 구성 밴드의 레코딩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던 영국의 음악학자 스파이크 휴스에게 악단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Arabesque에서는 그 악단의 전매 특허였던 리드(reed) 파트 화성이 탁월하게 발휘되었는데 헨리 앨런과 콜먼 호킨스처럼 빼어난 솔로이스트들이 빚어냈던 Sweet Sorrow Blues는 좋은 예다.
1936년에는 런던에 있는 헨리 홀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음악 경력에 있어서 유럽 시기라는 새로운 이력이 왔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는데 장고 라인하르트와 콜먼 호킨스 등과의 협업으로 일군 Farewell Blues와 카터의 압도적 기량이 돋보인 I’m Coming Virginia에는 그의 탁월한 기량과 유려한 서정성, 모방을 거부하는 선율적 독창성이 돋보인다.
디지 길레스피가 사이드맨으로 참여했던 1941년, 카터는 비밥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43년 서해안 지역에서 맥스 로치와 J. J. 존슨을 기용하여 새로운 스타일리스트로 거듭났다. 새 인생이 시작된 셈이었으나, 60년대까지 그에게는 영화와 TV라는 새 일감이 들이닥쳤다. 70년대 들어서는 정기적인 재즈 활동과 통상적 음악 교육은 물론 음반 작업까지 매우 왕성한 양상을 펼쳐 보여 The King이라는 애칭을 갖게 될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잠적 기간이 얼마나 길었던 간에 그는 재즈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뒷방 늙은이 신세”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으나 실제로 무대 공연자로서 결코 허점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종종 퇴역 JATP팀에 들어가 Lula, When Lights Are Low를 연주하며 아트 테이텀이나 벤 웹스터를 소환했다. 카터는 호킨스와 필 우즈와 팀을 이루어 활동했던 과거를 불러 보이며 1961년 이후 Further Definitions에서 편곡 실력에 조금의 감퇴도 없었다는 점을 똑똑히 실증했다.
1980년대까지도 무결점의 연주를 들려주었던 그는 뉴욕 Sweet Basil 클럽을 중심으로 재즈의 유려함과 우아함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