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 베이시 — 빅 밴드를 호령한 피아니스트

엄청난 독주 능력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절제력 탓에 기교적으로 범박한 수준의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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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 Ba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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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상 피아노란 악기는 연주자의 기교를 과시하는 진열대로 변신하기 십상이다. 재즈계에서만 얼른 꼽아봐도 아트 테이텀, 오스카 피터슨, 세실 테일러 같은 초절 기교의 피아니스트들이 대기 중이다. 그 중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장본인이 윌리엄 카운트 베이시인데, 엄청난 독주 능력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절제력 탓에 기교적으로 범박한 수준의 주자로 오인될 법도 한 아티스트다.

재즈계의 입장에서는 베이시란 인물을 월터 페이지의 ‘블루 데블스’라는 가극단 쪽 사람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가 그 흑백 혼합 밴드에 머문 것은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할 무렵의 1년여 전후였던 때로, 배니 모튼 오케스트라 출신들과의 혼성 밴드였다. 베이시의 현란한 솔로에 초점을 맞춘 Small Black이나 Toby는 뉴욕 스트라이드 스타일 베이시 버전이라 할 만했다.

베이시는 리틀록에서 자신의 악단을 만들기까지 모튼과 1934년까지 호흡을 맞췄다. 이듬해에 모튼이 세상을 뜨자 베이시는 원대 복귀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캔자스 시티로 돌아왔다. 일단 발을 붙이자 Reno Club에서 Baros Of Rhythm이란 이름의 상주 악단을 이끌며 라디오 방송 코너를 맡게 된다.

그 무렵 Bill Basie에서 ‘Count’로 호칭이 바뀐 베이시는 작가 존 헤먼드의 눈에 들게 되었다. 베이시에게서 일약 감동한 그는 전국 순회 일정을 잡게 되는데 시카고, 버팔로를 거쳐 뉴욕까지 아우르는 장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촌티를 벗지 못한 그 밴드는 대표 편곡자에게만 의존하던 관행 탓에 수석 연주자들을 배려한 독주 코너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1년도 채 못 되어 벅 클레이튼(트럼펫), 레스터 영-허셜 에반스(색소폰), 지미 러싱(보컬), 월터 페이지-조 존스(리듬) 등으로 이뤄진 ‘올 어메리컨 리듬 섹션’이 자리 잡아, 밴드의 특별한 트레이드 마크로 정착했다. 특유의 날렵함, 그리고 한 마디에 네 번씩 가하는 기계적 비트는 밴드의 보증 수표였다.

거장 레스터 영은 ‘If I Didn’t Care’, ‘Taxi War Dance’ 그리고 ‘Honeysuckle Rose’와 ‘Blue And Sentimental’을 무결한 보석으로 환생시켰다. 클레이튼이 ‘Topsy’와 ‘Good Morning Blues’에 들인 정성도 대단했다. 그런 식으로 보면 베이시 악단이 재탄생시킨 레퍼토리는 끝이 없다.

1938년에는 번뜩이는 재능의 디키 웰스가 들어와 ‘Panasie Stomp’와 ‘Texas Shuffle’을 선보이더니 연말에는 트럼펫의 헤리 에디슨이 가세해 히트작 ‘Every Tub’와 ‘Broadway’를 투하했다.

40년대에 들어 멤버 교체가 잦았으나 베이시는 버디 테이트, 돈 바이어스, 럭키 톰슨, 폴 건슬레이브스 등을 활용한 테너 색소폰 강화 전략으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51년 잠시 8중주단으로 바꾸긴 했으나 머잖아 빅 밴드 편성으로 회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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