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 하인즈

클래식을 전공한 얼 케네스 하인즈는 일찍이 10대 시절, 로이스 데퍼스 세레나이더스에서 직업 연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캐롤 디커슨과 어스카인 테이트 휘하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27년 시카고의 선셋 카페에서 루이스 암스트롱의 음악 감독으로 지명받았으며, 이들과 함께 일했다. 해가 저물 무렵, 에이펙스 클럽이 지미 눈과의 대기획물로 제안한 일련의 음반 작업에 착수했다. 긴 곡을 단품으로 엮는 하인즈의 솜씨가 빛을 발했다. 특히 Apex Blues와 My Monday Date 같은 작품에서는 특유의 ‘트럼펫 스타일’이 완숙기에 접어들었음을 천명하는 듯했으며, 지미 눈의 유려한 클라리넷과 대조를 이루는 연주가 화제였다.
그 해 암스트롱의 제2기 핫파이브와 함께 Fireworks와 Skip The Gutter를 취입했다. 암스트롱의 트럼펫에 맞추려 멤버들이 펼치는 경쟁은 진풍경이었다. 하인즈는 종종 펼쳐지는 그 변칙 리듬이 뻔뻔한 실수가 아니라 그의 통제력 아래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암스트롱에게서 독립해 시카고 그랜드 테라스에서 자신의 밴드를 결성했다. 전통적 레퍼토리를 위주로 다넬 하워드나 조지 딕슨을 주축으로 활동해 나갔으나, 세련화 작업을 그치지 않았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밥의 어법을 적극 수용했다. 실제로 찰리 파커, 윌리 쿡, 베니 그린, 워델 그레이, 사라 본과도 활동한 것이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암스트롱의 올 스타스 팀과 투어를 하긴 했으나 기존 레퍼토리 재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실제로 1960, 70년대는 하인즈의 부활이 벌어지기도 했다. 솔로나 트리오 취입, 올 스타 편성 등 어디서건 그의 피아노는 돋보였다. 숨을 거두기 직전 샌프란시스코의 캐너리 클럽과 종신 계약을 맺기도 했다. 원하는 아무 때나 연주할 수 있다는 계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