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etcher Henderson

플레처 해밀튼 헨더슨은 스스로 인정했듯 명랑한 스트라이드 피아노 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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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l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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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처 헨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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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rice Seymour studio - *Original source: Published as a publicity photo in the 1940s. A scan of the full original photo can be found via WorthPoint.Instant source: High-res scan via tweet by author Gary Bohan.

플레처 해밀튼 헨더슨은 그저 수완좋은 밴드 리더라기에는 너무 유쾌한 사람이었으며 선술집 피아니스트로서는 교육 수준이 너무 높았다. 굳이 따지자면 앞쪽이 맞겠으나 스스로 인정했듯 명랑한 스트라이드 피아노 주자였다.

겨우 여섯 살에 연주를 시작했으나 1916년 모어하우스 대학에서 취득한 화학 성적이 너무 우수해 음악 재능은 화젯거리에 오르지도 못 할 정도였다. 그에 대한 평가와는 관계 없이 헨더슨은 노래 감별 업무에서 탁월한 자질을 인정 받아 음반사 블랙 스완의 녹음 감독 업무 일을 맡게 되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에게는 뉴욕 로즈랜드 볼룸의 임시 예약 자리를 얻었는데 그 세월이 10년을 갔다.

초창기 밴드에서의 곡 Dicty Blues는 허드렛 여흥 거리에 불과했으나 1924년 루이스 암스트롱의 입단으로 만든 곡 Go Long Mule 덕에 솔로가 탁월하게 살아나면서 밴드의 입지가 뒤바뀌었다. 거기에 솔로이스트들에 잠재된 기량을 낚아 올리는 콜먼 호킨스의 편곡력이 날개를 달았다. 특히 지미 해리슨, 미프 모울 등 빼어난 트럼본 주자들의 활약은 이 밴드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베니 카터의 편곡 기량 덕에 밴드는 1930년대에도 개선곡을 이어가더니 36년에 상상을 뛰어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트럼펫에 로이 엘드리지를 비롯해 세상을 뜬 콜먼 호킨스를 이어 유능한 테너 색스맨 츄 베리가 자리를 메꿨다. 리더로서 헨더슨의 위상은 공고했다. 그러나 30년대가 종말에 이르면서 밴드의 기력은 소진되었다.

헨더슨은 베니 굿맨과의 공동 편곡자의 자격 혹은 6중주단의 특별 솔로이스트로서 그 명성을 근근히 이어갔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밴드 재건의 꿈을 저울질하던 그는 1849년 심장 마비로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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