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재즈를 만든 사람이야!

모튼은 당대의 초일류 피아니스트였다. 초창기 랙타임이 떨쳐내지 못한 클래식적 격식을 마디와 마디를 넘나드는 루바토 정서로 와해시킨 최대의 공신으로 모튼이 꼽히게 된 데에는 모튼의 엄청난 실력 때문이다.

  • Jelly Roll M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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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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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n 3, 2025

In a nutshell

    젤리 롤 모튼

젤리 롤 모튼

영화 감독인 당신에게 재즈 태동기의 거장 젤리 롤 모튼의 별난 삶을 그려보자는 제안이 들어 왔다 치자. 그러잖아도 영화의 소재로서 모튼에게 큰 호기심을 갖고 있던 당신은 고민에 빠진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이 자를 어디서부터 그려내지?’

히트곡 ‘The Crave’를 연주한 뒤 광산촌을 활보하는 장면이 좋을까, 복잡한 선율의 ‘Shreveport Stomp’를 신나게 연주하곤 어디론가 내빼는 모습일까… 20세기 들어서는 아예 스스로를 “재즈의 창조자(creator of iazz)”로 칭하고 다녔잖은가. 더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어 ‘1902년’이라고 그 시점을 못 박기도 했으니 점입가경이다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뭐라 하든 모튼은 당대의 초일류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이다, 초창기 랙타임이 떨쳐내지 못한 클래식적 격식을 마디와 마디를 넘나드는 루바토 정서로 와해시킨 최대의 공신으로 모튼이 꼽히게 된 데에는 모튼의 엄청난 실력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그의 고향 뉴 올리언즈에서 그는 젠체하며 프랑스풍을 강조하던 크레올의 풍습에 따라 페르디낭 르 망테(Ferdinand Le Menthe)라고까지 불리워졌다. 계급 의식이었든 허위 의식이었던 그가 주로 있던 곳은 금기의 욕망 구역이었다. 열 살을 갓 넘긴 아들이 초호화 오페라 하우스 바로 옆 홍등가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게 된 부모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악사를 피아노 교수(piano professor)라 부르며 우대하기 일쑤였던 1900년대 초반의 유곽 거리에서 엄청난 기량을 갖춘 모튼은 최적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엄창난 창작력의 소유자였다. 1902년 ‘King Porter Stomp’와 ‘New Orleans Blues’가, 1905년에는 ‘Jelly Roll Blues’, 1908년 ‘Frog-i-More-Rag’ 같은 작품들이 줄지어 나왔다. 기막힌 사실은, 거의 건달이나 진배없던 사내를 통해 초기 재즈의 정수가 전해졌다는 점이다.

A.I. Plays Jelly Roll Morton - Shreveport Stomp 1924 Version 2 (Classic New Orleans Jazz Piano)

Frog-I-More Rag

Jelly Roll Morton - New Orleans Bl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