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나의 것

30년도 더 지난 기억을 더듬어간다. 1991년 미국의 재즈맨 빌리 하퍼가 무대를 위해 서울에 왔다.

In a nutshell

    운명은 나의 것

운명은 나의 것

30년도 더 지난 기억을 더듬어간다. 1991년 미국의 재즈맨 빌리 하퍼가 무대를 위해 서울에 왔다. 나름 혈기방장했던 한국일보의 신출내기 문화부 기자였던 나는 겁도 없이(!) 이 중견 색소폰 주자를 인터뷰하러 갔다. 스윙과 블루스라는 재즈의 두 축에 대한 이해는커녕, 낯섬 혹은 새로움에 대한 갈증만이 주렁주렁 매단 채.

영어로 몇 가지 팩트를 챙기고 돌아서는 나를 하퍼가 불렀다. 자신의 5중주단과 만든 신보 ‘Destiny Is Yours’를 건네더니 몇 자 쓱쓱 적는 것이었다. ‘Keep listening and illumination’이라고. ‘잘 듣고 (세상을) 밝히라’는, 관례적 멘트였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나 돌이켜 보니 그 단문에는 진지한 재즈맨으로서의 중량급 발언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의 재즈는 엔터테인먼트와는 거리가 먼, ‘격’이 있었다. 귀에 쉬 들어오지 않는 선율과 육중한 톤의 연주는 대중 문화의 상투성에 침윤되지 않은, 어떤 날것으로서의 감흥을 여전히 자아내고 있었다. 실제 무대에서는 사제를 연상케 하는 장중한 디자인의 검은 옷에서, 마치 설법하듯 진중하면서 강렬한 음을 쏟아냈다.

잊고 지낸 하퍼를 왜 새삼 다시 소환하는가? 재즈를 즐기는 법. 재즈로 생각하는 법, 재즈로 사는 법에 다가서는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우선 맞닿아 있다. 그 길은 장대한, 아니 풍성한 역사의 강으로 향하는 통로이다.

이제 뉴올리언즈 재즈에서 출발해 윈튼 마살리스 너머에 이르기까지, 재즈의 깃발 아래 명멸해 온 스타들을 추적 하고자 한다. <재즈재즈>(황금가지)에서 ‘이 시대를 대표허는 뮤지션들’이라며 제목만 나열해 두었던 그들의 대표곡들을 차근차근 불러낼 것이다. 인터넷에 축적된 방대한 콘텐츠가 동참해 주지 않었다면 불기능했을 작업임을 밝혀둔다. 졸저에서 언급됐던 작품들이 발달된 매체 환경 덕에 바로 코앞에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