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을 말한다 — 박재천의 기억 (3)

자기만의 독창성을 갖고 거기 매달린다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본질적 꿈이며, 그래서 부럽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 특히 한국에서 그렇다는 사실은 한국에서의 문화란 과연 무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2011년 선생은 자기 음악의 정수라며 최종적으로 정리한 12곡을 수록한 앨범을 발표했다. 삼청동 녹음실에서 작업을 마쳐 레이블 ‘오디오가이’에서 발매되었다. 두 번째 솔로 앨범인 셈이다. 이 작품은 선생으로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나름의 숫자 매기기 작업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에 처음으로 제목을 붙였으니 ‘’가 그것이다.
실제로 솔, 레, 파의 세 음을 주조로 이룬 타이틀 곡인데 선생의 이전 작품과 비교해 본다면 음악적 효과가 몹시 특이하다. 자신의 울부짖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고자 했던 흑인의 정신을 되짚어 간다는 데 의미를 둔 작품이다. 그래서 예전의 공격적 연주에서 많이 비껴나 있다. 모두 9곡이나 솔로로 했던 그 앨범을 나는 선생의 음악적 매니페스토로 보고 싶다.
이 지점에서 나는 ‘강태환의 절망’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선 현실적으로 비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크다. 궁극적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진짜 재즈맨의 숙명이기도 하다. 독창적인 자신만의 작품, 자기만의 해석을 겸비해야 하는….
그러나 나는 선생의 음악이 이를테면 컨템포래리 음악의 이상(理想)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흔히 쓰듯 동시대에 인기 있는 유행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것들을 모두 종합했다는 의미에서, 또 재즈의 이름 아래 구현될 수 있는 음 현상 모두를 포괄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를테면 광의의 컨템포래리인 것이다.
선생이 특별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전위 음악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선생을 우연적이며 돌출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우리 음악계는 커다란 손실을 자초하는 셈이 된다. 나는 선생이 음악사적으로 보아 김순남 – 윤이상 - 강석희로 압축되는 한국의 창작 음악사(史) 서술에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인물이라 확신한다.
강태환은 스스로 곡을 만들어 끊임없이 연습하는, 말하자면 작곡가적 연주가이다. 굳이 택하라면 결국은 작곡가이다.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끊임없이 변주돼 가며 생성되는 것이 강태환의 음악이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우리의 전통 음악, 산조가 보여주는 발전 논리이기도 하다.
강태환은 그러므로 ‘현대 음악 작곡가’이다. 작곡하면서 동시에 본인이 재현할 수 있는 그 같은 능력은 굳이 비기자면 파가니니 정도일 것이다. 선생은 악보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 재연, 연주되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이다. 나는 선생이 언젠가는 ‘현대 음악 작곡가’로 규정될 것이라 확신한다.
기존 음악계의 평단과 선생 사이에서의 괴리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대 음악과 대중 음악의 주류적 평단이 소통 불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