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시대의 개막 — 광란의 20년대를 수놓은 선율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선율이 시카고와 뉴욕으로 퍼져나가며 광란의 20년대를 수놓는다. 루이 암스트롱의 등장으로 재즈는 집단 즉흥에서 빼어난 솔로이스트가 지배하는 음악으로 대변혁을 맞이한다. 대편성 악단의 출현과 듀크 엘링턴 같은 거장들의 활약 속에 재즈의 황금기가 펼쳐진다.

In a nutshell

    재즈 시대의 개막 — 광란의 20년대를 수놓은 선율

재즈 시대의 개막 — 광란의 20년대를 수놓은 선율

재즈의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뉴올리언스였다. 타지 출신의 뮤지션들도 대접을 받았지만, 최고수급의 연주인들은 여전히 뉴올리언스 출신의 재즈 뮤지션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당대의 전위 avant-garde였으며, 킹 올리버가 시카고의 명 클럽 링컨 가든에서 음악을 맡게 된 1922년은 원조 뉴올리언스 재즈가 대도시 시카고에 실제로 첫발을 들여놓은 쾌거로 기록된다. 재즈의 중심은 차츰 뉴올리언스에서 시카고로, 나아가서는 뉴욕 같은 대도시로 옮아갔다.

아직 북부 도시의 밴드들은 절도 있게 또박또박 끊어지는 래그타임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어서 그들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볼 때, 보통 흔히 말하는 재즈라기보다는 군악대 음악 같았다. 그 같은 음악에 융통성이 부여되어 마침내 재즈가 된 것은 뉴올리언스의 악단과 거기서 활약하던 대표적 관악 주자 지미 눈과 시드니 베셰 덕택이다. 뉴올리언스 지방의 토속 음악이 춤추기에 적합한 리듬, 완급이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한 음악으로 변용된 것이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이 있으니, 바로 뉴올리언스 최고의 적자 루이 암스트롱의 출현이다. 암스트롱이 1924년에 뉴욕으로 가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 합류한 것이다. 그 악단의 멤버들은 모두 다 교육의 혜택을 누린 인텔리들이었다.

암스트롱은 그들에 비한다면 철자법도 몰랐던 무식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일류급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뉴올리언스 재즈 특유의 집단 즉흥 개념을 독주자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재즈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원칙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재즈는 뉴올리언스 특유의 집단 앙상블 주의에서 빼어난 솔로이스트가 지배하는 음악이라는 새 원칙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뉴올리언스의 재즈는 행사용 음악으로서 사회 속에서의 역할이 뚜렷했기 때문에 특유의 집단 즉흥 원칙을 일찌감치 수립할 수 있었다. 재즈는 여전히 뛰어난 연주자 몇몇이 이끌어가는 음악이었지만, 희가극 극장(vaudeville theater)의 유행과 이에 따른 신세대 무용수들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여 재빨리 변신해 나갔다.

대편성 악단이 출현하게 된 데에는 그러한 음악 내적 요구 말고도 시대적 요청이라는 큰 이유가 있었다. 즉, 각 악단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직면하여 각자 살 길을 모색했는데, 그 과정에서 돈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몇몇 리더들은 사교 모임용 음악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악단 편성의 규모가 커졌으며, 이제 그러한 대편성 악단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즈 편곡자 • 재즈 악단 리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의 존재 양태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춘추전국 시대는 듀크 엘링턴과 돈 레드먼이라는 거장이 등장함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솔로 주자를 전면에 부각시킨다는 문제의 관건은 결국 편곡 작업을 얼마나 정교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들이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첫 단계에서 그것은 뉴올리언스 재즈 최대의 속성인 집단 즉흥의 중요성을 부쩍 줄이는 역효과만을 유발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특히 뉴올리언스 재즈 최대의 천재인 암스트롱의 스타일은 음악의 모든 영역 안으로 스며 들어갔으며 여러 다양한 악기 주자들 모두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암스트롱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악단 리더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별 볼일 없는 악단의 리더였는데, 예를 들면 댈러스의 알폰소 트렌트, 제시 스톤——스톤은 뒷날, 활동 무대를 캔자스로 옮긴다—— 신시내티의 잭 화이트와 캔자스의 베니 모튼 등이 그 대표격이었다. 이들은 모두 유쾌한 분위기의 재즈, 즉 쇼 비즈니스적인 재즈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듀크 엘링턴과 루이스 러셀이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그 사람들의 악단에 속해 있던 뉴올리언스 출신 연주인들의 힘이 지대했다는 점을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10인 편성 악단을 이끈 러셀의 경우, 뉴올리언스의 유명한 유흥가인 스토리 빌에 넘치던 음악적 활력을 자기 밴드에 고스란히 옮겨 심을 수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가장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놀라운 것은 높은 수준의 음악적 역량을 성취한 솔로이스트들의 연주력과 활력은 이 과정에서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뉴욕의 흑인 거주지인 할렘에는 유명한 사보이 볼룸 Savoy Ballroom과 코튼 클럽 Cotton Club 같은 사교장이 있어서 앞서 말한 악단들이 태동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인데, 그와 비슷한 악단이 출현한 지역은 거기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었다. 구세대의 음악인 뉴올리언스 재즈를 듣고 싶어 했던 사람들, 즉 쇼 비즈니스의 대편성 악단이 구사하는 음악에는 적성이 맞지 않았던 사람들의 구미를 충족시켜 줄 음악은 시카고의 남부 지구 south side가 그 본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