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그리는 재즈의 풍경: 역사, 속사정, 그리고 감상의 길
그렇다면 재즈의 보급과 사회 발달 정도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재즈 사회학 정도로 이름 붙이면 좋을 법한 이 문제에 대해 서구의 예술사회학은 이미 그 답을 제시해 두고 있다. 크게 두 가지 명제다.
일반 대중이 재즈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지고 나서라는 것이 그 첫째고, 어느 나라의 민주화 지수는 그 나라의 재즈 보급 정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이 그 다음이다. 이 책은 그 대명제들의 한국적 알리바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재즈의 탄생에서 현재까지, 즉 재즈의 역사를 되도록 간략히 정리했다. 책이 다소 딱딱해질 우려도 없지 않으나, 절대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가 탄생한 것이 10년 간격이니, 거기에 맞춰 약술한 것이다.
재즈라는 예술 장르에서 그렇듯 10년 간격의 양식적 발전상 stylistic development은 다른 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단히 특징적인 양상이다. 이 책에서는 각 시대의 특징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사실들 만을 뽑았다. 감상을 위한 수준에서 역사에 대한 그 이상의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주름 잡았던 아티스트들은 그러므로 아주 간략히 나열하는 데 그쳤다. 그들 개개인의 전기적 사실들과 함께 대표 앨범서(選)도 곁들였다. 향후 음반을 고를 때 하나의 유용한 지침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각 남긴 음악적 • 전기적 사실이 아니라, 그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들이 만들어낸 삶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 글이 재즈의 전체적 골격을 논한 하드 보일드 한 내용이라면, 뒤에 이어지는 글들은 재즈의 속 사정이다.
거기에는 재즈라는 명칭이 붙기 까지의 내력, 재즈라는 즉흥적 음악 속에 숨은 기이한 발명의 에피소드, 재즈적 사제지간, 초기 재즈 뮤지션들의 교육 정도, 파커라는 재즈사에 길이 빛나는 거장의 체취 등 비교적 정사(正史)에 가까운 내용이 우선되어 있다.
또 일화에 근거한 글도 군데군데 넣었다.


▲ 존 콜트레인의 직계 중 한 사람인 빌리 하퍼. 1991년 조용하게 내한한 그는 정통파 재즈 뮤지션으로 성실한 공연을 펼쳤다. 자기 특유의 묵직한 재즈만큼이나 과묵했던 그는 당시 인터뷰 갔던 나에게 최신 앨범 운명은 당신의 것 Destiny Is Your을 건네면서 자신의 사인과 함께 이렇게 썼다. 마치 경구처럼. 미스터 장, 열심히 들으시오. 그리고 언제나 깨어 있으시오 Mr. Chang, Keep Listening and Illumination.
그들을 옥죄던 인종 차별, 본명보다 더 즐겨 불린 별명들의 내력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몇 가지 정사와 일화들을 통해서 재즈 특유의 인간관과 문화관 같은 것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본격 감상을 위해 쓴 글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특히 글쓴이의 경험에 많이 의지했다. 그것은 재즈 즐기는 법이라고 할 만한 글이 본격적으로 씐 선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먼저 문화부 기자로서 재즈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 저질렀던 실수를 돌이켜 보았다. 무식(無識)이 왕이라는 통설이 객쩍게 떠오를 법한 개인적 에피소드를 그렇게 앞세운 것은 재즈도 결국 외래 문물인 한은 어느 누구도 그 정도의 오해, 혹은 착각을 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글쓴이가 체계를 세워 작성한 제법 긴 재즈 리프트이기도 한 셈이다.
문외한이라도 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호흡한 재즈 이야기가 바로 뒤에 나온다. 이 재즈 곡을 한 번 들어야지하는 마음으로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 말의 한국에서 살고 있고, 따라서 그 시대의 TV를 시청한다면 듣지 않을 수 없는 재즈 음악을 취합하는 것으로 그 이야기는 출발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재즈의 진폭이 어떤 식으로 점점 커가는가를 그 글에서 밝혀보려 했다.
그 글은 주간한국 1994년 11월에 실었던 기사를 기본 텍스트로 하여, 이후의 상황과 생각을 추가시켜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재즈의 변신 정도로 이름 붙이면 적당한 글들이 뒤를 잇는다. 재즈와 클래식의 관련 양상, 한국에서 특히 인기를 누리는 보사노바(bossanova) 이야기 등이 그것들이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 사이를 자유자재로 운신하는 재즈의 날렵함을 그 글이 제대로 서술해 주었기를 바란다.
다음으로는 재즈의 맛을 더 깊이 느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 될 글들이다. 재즈치고는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모아오고 있는 걸작 테이크 파이브를 둘러싼 이야기로 운을 뗐다.
그러한 스탠더드 넘버들의 재해석사(史) 이야기가 곧 뒤따른다. 그 같은 전통이 왜 그리 강인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쓴 글이다.
어떤 장르든 연륜이 쌓이게 되면 *고전(古典)*이란 것이 자연스레 자리 잡게 마련이다. 그 같은 양상은 재즈에서 특히 강인한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재즈를 오래 듣다 보면 이 뮤지션도 저 뮤지션도 자기 류의 연주로 해석하는 몇몇 곡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시점에 가서는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 작품들을 통틀어 스탠더드 넘버라 한다.
그 속에 소개된 음악들을 구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들어보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음악, 특히 재즈는 이야기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경험 또는 감상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레퍼토리들을 우선으로 했다.
이 정도가 말하자면 한국적 재즈 이야기이다. 또 그 정도의 내용이라면, 재즈에 대한 일차적인 감(感)을 잡는 데에는 손색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글을 막으려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