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유행인가 예술인가? 그 물음 앞에 서서

최근 한국을 휩쓴 재즈 열풍, 단순한 유행일까 아니면 그럴싸한 문화 상품에 불과할까? 90년대 대중문화 담론의 흐름 속에서 재즈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 흑인 노예의 삶에서 피어난 재즈가 어떻게 옹색한 인간들을 '열린 삶'으로 이끄는 유효한 형식이 되었는지, 그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깊이 탐구한다.

In a nutshell

    재즈, 유행인가 예술인가? 그 물음 앞에 서서

재즈, 유행인가 예술인가? 그 물음 앞에 서서

최근의 재즈 붐은 불쑥 던져진 선물 보따리인가? 뭔가 있어 보이는 그럴싸한 양풍(洋風) 인가? 그래서 잘 팔리고 있는 문화 상품인가? 우리에게 그 재즈란 무엇일까? 그 형식과 내용은 어떤 얼개를 하고 있을까?

최근 들어 재즈에 관한 담론들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제기되고 있기는 하나, 바로 위 와 같은 식의 문제의식 problematics은 논외로 하고 있다. 과연 사정이 그러하다면, 20세기 말 한국에서의 재즈란 일시적 유행 fad 이상은 되기 힘들 것이다.

재즈가 이렇듯 급속하게, 또 범사회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일 문화 현상 그 이상이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전체적 의미망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를 위해 이제 재즈에서 시야를 조금만 밖으로 돌려보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즈 역시 수많은 문화 현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저 질문은 1994년 여름, 대학가를 누빈 한 소책자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대중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그 팸플릿은 곧이어 이렇게 묻고 있다.

〈문화, 왜 하필 문화인가〉라고.

그 팸플릿은 대중문화에 관한 지적 관심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 것이 실은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라고 전제한다. 대중문화의 담론 수준이 그때를 기점으로 질적 양적으로 풍성해져, 소논문이나 자투리 글이 아니라 본격 단행본 수준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지적 욕구 역시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 수준이 세련화 • 구체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그 글은 1990년대 이후의 추세를 상당히 잘 요약하고 있다. 1980년대 진보적 지식인들의 논제는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같은 변혁론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사회 변혁의 테마가 대중문화로 이입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중문화론이 여러 수준에서 생산되었다.

그 같은 추세를 맨 처음 촉발시켰던 테마는 에이젠슈테인의 「전함포템킨」에서 제임스 캐머런의 「터미네이터」까지, 영화였다. 전문 평자에서 대학 교수까지 최근 범람하는 영화에 대한 여러 논의와 에세이들, 그리고 TV의 경우에는 새 영화나 새 비디오 소개 프로들이 속속 생겨나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재즈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한발 늦게였다. 그러나 재즈는 일단 한 번 주목을 받자 그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해 갔다. 사회적 붐의 양상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이제 〈재즈 열풍〉은 하나의 예술적 양식 style로 이어질지, 아니면 덧없이 사라지고 말 광풍 fad이 되고 말지, 그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이듯 여러 차원에서의 정교한 논의보다는 〈재즈〉라는 뭔가 그럴 듯한 이미지를 자기 편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양상이 짙다. 이 책은 그래서 재즈에 대한 본격적이고 유효한 〈담론들〉이 되기를 바라고 씌어졌다.

사회 과학도 자연 과학도 말해 줄 수 없는 삶의 욕구와 진실, 제대로 정규 과정을 거쳐 배우지는 못했으되 뭔가 표현하고 싶은 열망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재즈는 일러준다. 재즈는 그러므로 옹색한 인간들을 __열린 삶__으로 인도하는 매우 유효한 형식으로서 출발했다. 우리는 재즈가 왜 흑인 노예 사회에서 유래했는지, 그리고 왜 흑인 빈민가의 삶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고 있다.

그들에게 재즈란 진흙 구덩이에서 피어오른 한 떨기 연꽃과 같은 그 무엇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것이 재즈였다. 그 향기는 머잖아 세상을 감동케 했다. 온갖 현란한 이미지와 붐, 유효한 판촉 수단으로도 재즈가 동원될 수 있다. 그것도 좋다. 참 재즈는 참 재즈로서 분명 어디선가 온존하기 때문이다.

재즈는 인간을 구속 않는다. 이것이 길이요, 정답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표현의 통로로서. 글자 한 자 못쓰는 알짜 무식꾼도, 대학 교육을 모두 이수한 인텔리도 그래서 재즈를 자신의 가장 유효한 표현 매개물로 삼아왔다.

「재즈가 이야기하는 것은 삶의 진실이다. 재즈는 난관에 처해 본, 그리고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승리와 영광의 음악이다」 흑인 민권 운동의 아버지, 일세의 정신적 리더였던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베를린 재즈 페스티벌에서 했던 연설이다.

재즈는 그러므로 __열린 삶__으로 이끄는 믿음직한 통로이다. 그 사실을 이번 기회에 여러 다양한 차원에서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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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는 클래식과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그 모범 답안을 제시한 MJQ. 이 노장들은 1995년 11월 12일 결성 45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세계 순회공연의 종착점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장식했다. 한국에 불어닥치고 있는 재즈 열풍에 감동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